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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희 협성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구한말 발행(1902년)된 제일은행권 지폐 초상의 주인공. 생전 약 500개 회사 설립, 약 600개 교육·사회사업에 관여. 노벨 평화상 후보로 두 차례(1926, 1927년) 거론.

대단한 이력의 주인공이다. 대체 누굴까? 아쉽게도 한국인은 아니다. 힌트를 주면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영단어 'Bank'를 '銀行(은행)'으로 번역했다는 설도 있다. 결정적 스포일러다. 내후년 일본 새 지폐의 초상으로 선정됐다.

일본 재무성은 3년 전 새로 발행할 천엔, 오천엔, 일만엔 권 지폐 도안을 공개했다. 새 지폐에는 자국 근대화를 이끈 의학자와 교육자, 경제인 등 각 분야의 대표주자 세 명을 선정했다. 천엔 권을 장식한 초상에는 근대 일본 의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郞)가, 오천엔 권에는 최초의 여성 유학생이자 메이지(明治)시대 여성교육 선구자였던 츠다 우메코(津田梅子)가 꼽혔다.  


'올바른 부가 아니면 영속할 수 없다'
日 대표 경제인 시부사와 삶의 철학


뭣보다 큰 주목을 받은 건 최고액권 일만엔의 새 인물이었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시부사와 에이이치( 一, 1840~1931)'였다. 과거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경제인으로서 또 초대 인쇄국장으로서 일본은행권 초상의 후보자로 몇 차례 거론된 바 있다. 1963년에는 최종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당시는 위조방지를 위해 초상에 수염이 있는 인물이 선호됐다. 이후 위조방지 기술이 발전하면서 수염 없는 여성도 지폐에 사용됐고, 마침내 일만엔 권에 시부사와의 초상이 선택되기에 이르렀다.

시부사와는 에도시대 말기 사이타마(埼玉)현의 부유한 농민 자제로 출생해 사무라이 신분인 막신(幕臣)이 됐으며, 메이지시대 초기에는 신정부 관료가 된다. 이어 유럽 파견 사절단의 일원으로 선진 경제 시스템을 습득한 후 대장성(현 재무성) 관리로 등용돼 화폐와 금융, 조세, 회계 제도 등의 개혁에 참여해 일본을 설계한다. 그의 나이 29살 되던 1869년에는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 '상법회소(商法會所)'를 설립한다. 1873년에는 출세가 보장된 대장성 관료의 지위를 버리고 경제계에 투신해 크게 활약한다. 일본 최초의 은행인 '다이이치(第一)국립은행(현 미즈호파이낸셜그룹)'을 시작으로 도쿄해상화재보험(현 도쿄해상일동화재보험), 도쿄증권거래소, 도요방적주식회사, 기린맥주 등 500개 이상의 기업·단체 설립에 관여한다. 그 대부분은 일본 경제와 산업을 뒷받침하는 우량 대기업으로 성장한다.

"부(富)를 이루는 근원이 뭔가 하면, 인의도덕(仁義道德)이다. 올바른 도리의 부가 아니면, 그 부는 온전히 영속할 수 없다." 시부사와의 삶과 철학을 관통하는 말이다. 특히 그는 공익을 추구하는 '도덕'과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는 본질적으로 일치한다는 '도덕경제합일설'을 설파했다. 기업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게 아닌 사회도덕에 기반을 두고서 이해관계자에게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논지다. 개인이 일궈낸 이익은 독점하는 게 아닌 사회에 환원해 전체가 공유함으로써 국가 전체를 풍족하게 만들어야 한다고도 했다.

개인 이익 사회환원 전체 풍족 취지
생애 600여개 교육·사회사업 실천
관민유착·경영자 부패 더없이 경계


"경영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언급한 역사적 인물 중 시부사와보다 앞선 이는 없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지칭되는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의 격찬이다. 서구사회보다 한 발 앞서 경영의 본질을 꿰뚫고 이를 실천한 인물이 시부사와라는 거다. 실제로 시부사와는 생애 600여 개의 교육·사회사업에 참여해 지론(common good)을 실천에 옮겼다. 또 그는 허업(虛業)이 아닌 실업(實業), 투기(投機)가 아닌 투자(投資), 독점(獨占)이 아닌 경쟁(競爭)을 외쳤으며, 관민유착과 경영자 부패를 더없이 경계했다.

당시 일본이 신정부와 선각자들이 앞장서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의 선순환 고리를 설계하는 동안 조선은 내정 혼란·실정으로 유약했고 국제 정세에는 무지몽매했다. 주지하듯 그 대가는 혹독했다. 오늘날 시부사와는 일본에선 근대화의 '원훈(元勳)'으로 추앙받고, 한국에선 일본의 한반도 경제침탈 기반의 '원흉(元兇)'으로 지탄받는다.

/김광희 협성대학교 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