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정적을 깨는 한 통의 전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홈페이지에 게시된 진상조사 보고서는 한 공장의 폭발사고 내용이었다. 인화성 물질을 사용하던 회사에서 일어난 사고로, 국적이 서로 다른 4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속보라는 이름을 달고 폭발사고의 처참한 현장이 오후 한나절 포털사이트에 오르내렸다. 그리곤 다른 사건과 사고에 떠밀려 세상의 기억 저편으로 쉽게 잊혔다. 사고가 일어났고, 누군가 죽어갔다는 사실도. 나와 동료들은 사고의 원인을 조사하고 관계 당국을 찾아다니며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요구했다. 그 내용을 담아 보고서를 작성했다. 궁금했다. '왜 이 보고서가 필요할까'. 사건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르고 사회에서 잊힌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요. 그런데 왜 필요하신 거지요?"
"그 사고로 아이 아빠가 죽었어요. 아이가 크면 아빠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알려주고 싶어서요."
우리의 보고서가 누군가의 마지막 생존기록이자, 가족들이 보관해야 할 소중한 자료라는 생각에 미안함과 다행이라는 마음이 교차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인권 활동'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내가 쓴 한 줄이 누군가의 마지막 기록이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한 번의 마주침도 한순간의 이야기도 쉬이 흘려보낼 수 없었다. 누군가의 삶과 연결된, 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이런 과정이 무겁고 힘이 들기도 했지만, 희망의 작은 틈새를 찾게 되면 금세 기운을 차렸다. 더디지만 세상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사람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 '인권'으로 변화를 만드는 일, 내가 몸 담고 있는 다산인권센터에서 지난 30년간 해온 일이다.
1990년대초 설립된 다산인권센터
사건 분석·피해자 세상에 알려
가족들에겐 소중한 자료 '무게감'
다산인권센터는 '인권'이라는 이름이 낯설었던 90년대 초 만들어졌다. 경찰에 의한 고문과 가혹행위,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던 국가보안법, 무분별한 재개발 등 시대가 만들어 낸 아픔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문제를 인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행동해왔다. 삶의 터전이 위협받는 곳이 우리의 현장이었다. 미군기지확장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대추리, 존엄한 노동이 위협받는 쌍용자동차 공장 앞, 용산 참사 망루 밑, 밀양 송전탑 건설 현장에서 인권을 이야기해왔다. 이윤보다 사람의 생명이 먼저인 세상을 꿈꿨다. 삼성 반도체 직업병 문제, 세월호 참사, 코로나19 등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산업재해, 재난과 참사 현장에서 국가와 기업에 책임을 물었다. 차별과 소외에 맞서 평등을, 국민을 억압하는 국가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쳤다.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인권침해 사건의 피해자, 해고 위협에 놓인 노동자, 재난 참사의 생존자, 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 등 만나는 사람들과 동료로 함께하며 인권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힘을 쏟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해온 인권의 문제를 알렸다. 기억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사건을 분석하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기록했다.
이렇게 다산인권센터는 지난 30년 동안 인권의 시선으로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켜왔다. 절망의 구절에서 희망을 읽었고 낙관의 힘으로 버텨왔다. 그간의 노력 덕인지 이제 인권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가 되었다. 오히려 나의 권리를 앞세워 또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또 다른 방향으로 길을 찾는 인권의 나침반이 필요한 때이다. 다산인권센터의 활동이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윤보다 생명 먼저인 세상 꿈꿔
내달 28일 30년 응원 '후원의 밤'
10월28일,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온 다산인권센터의 30년을 응원하고 축하하는 후원의 밤이 열린다. 공간이전과 활동비 마련을 위한 후원 모금(https://dasan30th.modoo.at)도 준비 중이다. 많은 시민들이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 가는 인권단체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해주시길 바란다.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