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YS) 전 대통령은 1987년 대선 때 전국 유세장을 돌며 "군부 독재를 '학실히' 종식시키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복모음 발음이 힘겨운 경상도 출신답게 YS는 '확실히'를 '학실히'로 발음했다. 아무도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정치인의 확신이 '학실히'를 통해 확실하게 대중에게 전달됐다. 1992년 대선 유세 때는 실제로 '관광도시'를 '강간도시' 비슷하게 발음하는 현장을 수차례 목격했지만, 기자들은 반주용 에피소드로 여겼다.
특정 발음을 본인이 착각해 들은 대로 인식하는 일이 왕왕 있다. 몬더그린(Mondegreen) 현상이라 한다. 개그맨 박성호의 몬더그린 개그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 팝송의 영어가사를 우리말로 바꾸었는데, 얼마나 절묘했는지 웃음 폭탄이 터졌다. 에릭 카멘의 노래 'All by My Self'는 '오빠 만세'로 지금도 회자되는 몬더그린 개그의 백미이다.
몬더그린 현상은 기본적으로 착각이다. 본래의 말이 분명하게 있으니 착각이 재미 있으면 웃고 말 일이고, 심각하면 원전을 찾아 착각을 해소하면 그만이다. 대부분 큰 문제 없이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중 사담에 나라가 엎어졌다. 윤 대통령이 글로벌펀드 재정회의에서 한국이 1억달러를 부담키로 발표한 것과 관련해 "국회에서 이××들이 승인 안해주면 ○○○ 쪽팔려서 어떡하나"는 발언이 국내 지상파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탓이다. 유튜브 자막엔 ○○○을 '바이든은'으로 표기했다. 야당은 동맹국인 미국의 의회와 대통령을 욕해 동맹을 위협하고 국격을 떨어뜨린 외교참사라 일제히 공격했다. 대통령실은 뒤늦게 국회는 한국 국회이며, ○○○은 '날리면'이라고 해명했다.
민주당은 '바이든'으로 듣고,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날리면'으로 듣는다. 참석자들은 '○○이'로 들었다는데 최강욱 의원은 '짤짤이'라 했고, 많은 민주당 사람들이 최 의원의 주장을 두둔했었다. 대통령이 무심결에 한 실수로 덮어 줄 아량이 있었다면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죽고 사는 문제가 됐다.
지상파 유튜브의 확신에 찬 자막이 초래한 몬더그린 현상에 정치 진영이 패싸움을 벌인다. 진영에 따라 같은 말을 달리 듣는 정치적 환청 현상이다. 한국 정치의 막장, 끝이 안 보인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