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의 부친은 품계로 종칠품인 동계공랑이었다는 것만 전할 뿐, 그의 자세한 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희경은 예학에 밝아 국상이 나거나 사대부가에서 상을 당하면 그를 부르곤 했다. 임란 때는 의병에 참여할 만큼 나라를 걱정했다. 그는 시문학을 통해 사대부들과 친교를 맺었다. 유희경은 당시 여항시인인 백대붕과 교류하면서 '풍월향도'라는 이름의 모임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매창(李梅窓)의 본명은 이향금이다. 계유년에 태어나서 계생(癸生), 계랑(桂娘)이라고도 불렀다. 매창은 1573년에 부안현리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관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녀 역시 어려서부터 기적에 올랐을 것이다.
매창은 한시와 시조에 능했고 가무 및 거문고에 빼어난 기량을 보였다. 시조와 한시 59수가 작품집 '매창집(梅窓集)'에 전해지고 있다. 홍만종(1643~1725)이 '근래에 송도의 황진이와 부안의 계생은 그 사조가 문사들과 비교하여 서로 견줄 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 후 매창은 황진이와 함께 조선의 여류시인으로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만나기전 서로 설레기는 마찬가지
매창의 거문고에 유희경 가슴 촉촉
매창의 한시 '자상(自傷)'에서 '서울 꿈 삼년/호남에서 또 한 봄이 가는구나/황금에 처음 마음이 바뀌어/한밤에 홀로 마음이 상하는구나'라고 노래한 것을 보면 서울에서도 3년 정도 기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서(1570~1624)의 '석촌유고(石村遺稿)'에는 매창의 시 한 편이 실려 있는데 그 시 아래에 '일찍이 내 친구의 첩이 되었다가 지금은 청루에 있다'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첩실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매창은 부안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그녀가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매창의 나이 29세이던 1601년에 부안에서 허균을 처음 만나면서 매창의 한시와 시조는 조선 최고의 여류문인으로 칭송을 받게 되었다.
어느 날, 부사 이귀(李貴)로부터 유희경이 부안에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 매창은 가슴이 설렜다. 뜻하지 않은 영광이기도 하고 기쁨이었던 것이다. 당시 매창은 기생생활을 청산하고 서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초막을 짓고 낙조를 바라보는 것으로 공허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거문고와 시로 지난 세월을 반추하는 일은 서글프고 외로웠다. 매창은 부안으로 달려갔다. 얼마나 보고 싶고 흠모했던 시인이던가.
'…오늘 가까이서/얼굴을 대하니
선녀가 지상에 내려온듯 하구나…'
눈빛은 안타까움과 정념 타올랐다
유희경은 며칠 후 부안에 도착했다. 매창은 하루가 여삼추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유희경을 기다렸다. 유희경도 매창이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고 설레기는 마찬가지였다. 매창은 주안상을 차려놓고 유희경을 맞았다. 매창과 마주앉은 유희경은 술자리가 거나해지자 거문고를 청했다. 청아한 매창의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거문고의 선율은 유희경의 가슴속을 촉촉이 적셨다. 유희경은 매창의 소리와 거문고의 선율을 감상하고 나서 시 한 수를 짓고 거문고 현을 골랐다.
'일찍이 남쪽의/계랑 이름을 들었는데 그녀의/시와 노래가 서울까지 들리더라/오늘 가까이서/얼굴을 대하니 선녀가 지상에 내려온 듯 하구나/나에게 신비의 선약이 있어/찡그린 얼굴도 고칠 수 있는데 금낭 속 깊이/간직한 이약을 사랑하는 네게 아낌없이 주리라'. 이에 계랑이 화답한다. '내게는 오래된 거문고 하나 있다오/한 번 타면 온갖 정감 다투어 생기는데도/세상 사람들이 이곡을 아는 이 없으나/임의 피리소리에 한번 맞춰보고 싶소'.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거문고를 뜯고 거문고 선율에 실어 소리를 했다. 밤하늘로 거문고 선율과 매창의 소리가 은하수처럼 흘렀다. 밤은 삼경으로 가고 두 사람의 눈빛은 안타까움과 정념으로 타올랐다.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