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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소설가
10월은 연달아 쉬는 날이 많았다. 직장인은 아니지만 이렇게 빨간 날이 많으면 여러 계획을 세우게 된다. 부모로서 아홉 살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놀러가느냐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최소한 요 정도는 써야지'하는 작업계획도 세우고, 사놓고 못 읽은 책들을 읽어치우려는 계산도 하게 된다.

개천절을 낀 주말에는 겨우 책 한 권만 읽었다. 놀다보니 그리된 것이지만 왠지 억울하다. 내 노트북에 새로 쓴 글자가 몇 알이나 담겨있나, 냉장고에 들어있는 사과가 더 많을 것이 아닐까, 스멀스멀 불안이 몰려오면서 작가만의 고해성사를 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고해소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신부님께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이번 주에는 놀기만 했습니다. 책은 달랑 한 권, 그것도 매우 얇은 산문집 한 권 읽었습니다. 소설 파일을 아예 펴보지도 않았고 노트는 두 장 썼나? 아무튼 형편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세히 늘어놓다보면 갑자기 또 화가 난다. 왜 이렇게 쩨쩨해졌나! 프랜 레보비츠의 경구를 떠올려 보라고! '난 너무 천천히 글을 써서, 내 피를 잉크로 써도 다치지 않을 정도다'. 이 정도 넉살을 떨어줘야 나무늘보 작가로서 장수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에잇, 모르겠다. 놀자!
 

그리고 놀았다. 한 주가 훌쩍 흘러 한글날 연휴가 끝나가자 이번에는 토니 모리슨의 경구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왜 글을 쓰는가? 쓰지 않으면 삶 속에 처박히기 때문이다'. 한창 삶에 처박히는 중이라 그런가 더는 참지 못하고(?) 글을 썼다. 물론 시작은 반성문으로, 끝에는 뭐가 나올지 모를 문장을 우선 달려본다.

휴일 잔뜩 품은 10월 첫째·둘째 주
방황끝에 카페 이동 닻 내린 '책상'


쓰면서 문득 생각하니 이 곳이 얼마나 비싼 비용을 치르고 얻은 책상인가 싶다. 대체휴일이 끝나가는 월요일 오후 다섯 시가 되어서야 나는 북카페의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있고, 옆 탁자에는 이숲이가 나무클립을 끼워서 만드는 뭔가에 푹 빠져있다. 이렇게 엄마를 놔주기까지 우리는 문구사에 가서 공작세트를 사오고, 쌀쌀한 날씨에 대비한 옷을 사고, 그러다보니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오다가 동전을 넣는 뽑기를 두 판 하고, 북카페로 이동해 음료를 주문하고서야 내가 좋아하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치른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니, 거기에 앞선 연휴의 이모저모를 생각하니 내가 앉은 책상이 얼마나 귀하고 비싼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이 카페의 탁자를 '책상'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카페가 있고, 카페 안에는 또 여러 개의 탁자가 있는데 왜 어떤 탁자만이 '책상'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합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창가 자리라거나 탁자와 의자가 편하다거나 신간이 놓여있고 음악이 거슬리지 않으며 주인이 적당히 무관심하고…. 이런 요소로만 말할 수 없는 화학적인 무언가가 카페의 탁자를 '책상'으로 만들어준다. 이따금 나는 '책상'을 찾아 집을 나선다. 노트북을 매고 카페에 들어선 내가 항해중인 배라면, 어떤 탁자에 이르러 비로소 '닻'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 딱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책상'에서는 글이 써진다는 것이다.

아늑함에 노트·노트북 둘 다 펴놓고
메모와 타이핑 오가며 즐겁게 첨벙
연휴끝… 집에서 즐겁게 사과 먹을것


휴일을 잔뜩 품은 시월 첫 주와 둘째 주의 방황 끝에 내가 닻을 내린 책상-섬의 아늑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노트와 노트북을 둘 다 펴고, 이 쪽의 메모와 저쪽의 타이핑을 오가며 즐겁게 첨벙거렸다. 이로써 내 모든 죄가 사하여 질 수는 없겠으나 연휴의 끝자락을 고해소에서 보내지는 않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가면 즐겁게 사과를 베어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