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행복 함께 느끼고 배려하는데
인간은 타인 아픔 무관심한듯 보여
1960년대 중반, 두 과학자가 비슷한 실험을 했다. 이번에는 사람이 아닌 붉은털원숭이가 실험 대상이었다. 이 실험은 곁에 있는 다른 원숭이가 전기 충격을 받는 모습을 보았을 때 붉은털원숭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두 과학자는 먼저 붉은털원숭이에게 그 날치 먹이를 얻으려면 레버를 당겨야 한다는 사실을 훈련시킨 뒤 그렇게 학습된 원숭이의 바로 옆 우리에 다른 원숭이를 넣었다. 그런 다음 실험을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붉은털원숭이가 먹이를 얻기 위해 레버를 당기면, 옆 우리의 원숭이에게 강한 전기 충격이 가해지도록 했다.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옆 우리의 원숭이가 전기 충격을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이자 붉은털원숭이가 레버 당기는 것을 중단했던 것이다. 과학자들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붉은털원숭이는 레버를 당기지 않아 먹이를 먹지 못하면서도 며칠 동안 그것을 당기지 않았다.
붉은털원숭이는 그렇게 굶고 있었지만, 옆 우리에 있는 원숭이는 고통스러운 전기 충격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레버가 있는 우리의 원숭이들은 낯선 원숭이나 토끼처럼 다른 종의 동물이 있을 때보다 한 우리에서 알고 지내던 원숭이가 있을 때 레버를 덜 당겼다. 또 전기 충격을 경험해본 원숭이들은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은 원숭이들보다 더 오랫동안 레버를 당기지 않았다고 한다.
밀그램의 실험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붉은털원숭이 실험은 얼마 전 내가 읽은 '앞으로 50년'(존 브록만 엮음, 이한음 옮김, 생각의 나무 2002년)에 실린 '대체 가능한 정신'(마크 하우저)에서 처음 접했다. 글을 읽고 나는 지구에서 가장 우월한 종이 인간이라는 생각을 의심하게 되었다.
붉은털원숭이 실험은 인간에게서 정반대의 결과를 얻은 밀그램의 실험에 비춰보면 정말 놀랍다. 두 실험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붉은털원숭이는 다른 개체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거나 느낀다 해도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실험대로라면 붉은털원숭이는 다른 원숭이들의 고통과 행복을 함께 느끼고 배려하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해석도 있겠지만 본질은 불변
'육체·정신적' 동물에 배워야 하는
허약한 존재… 내 생각 바꿔야 하나
물론 다른 해석도 있다. 붉은털원숭이가 다른 원숭이들의 반응에 불쾌했을 수도 있다는 것, 곧 혐오스러운 상황이라서 레버를 당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보복을 우려했을 수도 있다는 것, 곧 나중에 자신이 전기의자에 앉아 다른 원숭이에게 당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한다 해도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해석이 옳다면 인간은 붉은털원숭이와 달리 타인의 고통을 혐오스러워하지 않으며 보복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경우도 인간의 사회성이 붉은털원숭이의 사회성보다 낫기는커녕 도리어 못한 셈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다른 동물과 달리 타인의 고통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인간이며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배려와 존중과 공감을 낳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런 생각을 바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다른 동물에게 배워야 하는 허약한 존재일 수 있다고.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