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9월 25일부터 이달 12일까지 훈련을 빙자해 중·단거리 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과 순항 미사일을 쉼 없이 발사했다. 미국의 괌 기지를 겨냥한 중거리 탄도미사일은 일본 상공을 통과했다. 단거리 탄도미사일은 한·미·일 연합훈련이 벌어진 동해를 겨냥했다. "전술핵탄두 탑재를 모의한 탄도미사일 발사 훈련"이라고 발표했다. 미사일에 핵탄두만 장착하면 한·미·일이 북한의 핵공격 사정권에 갇힌다는 무력시위였다.
대한민국의 대응은 초라했다. 북한이 알려줄 때까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이 저수지에서 솟아오른지도 몰랐다. 킬체인 작동 차원에서 발사한 현무 미사일은 후방으로 낙탄해 우리 기지를 불태웠고, 전술지대지 미사일은 어디론가 실종됐다. 국민들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중거리 탄도미사일이 영공을 통과하는 동안 일본은 주민대피 명령을 내렸다. 발사 원점인 북한을 머리맡에 이고 있는 우리는 눈 깜짝이지 않고 일상을 유지했다.
태극기 지킬 사람들 '친일·종북' 낙인 찍어
분명한건 모두 사실 아닌 정략적 가상현실뿐
연평도 주민들은 놀라 흩어졌는데 육지 사람들은 왜 이리 평온할까. 시청각에서 벗어난 공포를 상상만으로 체감하기 힘들다. 내륙의 국민들에게 북한 미사일은 시청각 범위 밖의 일이다. 반면 연평도 주민들에게 북한의 포 사격은 청각으로 확인한 실체적 공포였다. 2010년 북한의 침공으로 섬 전체가 포연에 포성에 잠겼던 악몽을 일깨우기에 충분했을 테다.
일상적 공포와 만성적 위기는 공포도 위기도 아니라는 무의식을 키운다. 공포와 위기의 실체는 그대로인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실체를 지워버리는 무의식은 치명적이다. 생존을 위한 위기 감지 본능은 퇴화하고 보이고 들리는 것만을 세상의 전부로 여겨서다.
대한민국이 마치 거대한 인공 무대에서 가상현실을 살고 있는 투르먼처럼 보인다. 정치 집단의 치밀한 창작과 연출 덕분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한미일 동해 연합훈련을 "극단적인 친일 국방"이라고 단정했다. "욱일기가 다시 한반도에 걸리는 일이 생길 수 있다"고도 했다. 국민의힘은 한미일 연합훈련이 불편한 집단은 북한과 민주당뿐이라는 논리로 맞받아쳤다. 김기현은 "이심정심"(이재명의 마음이 김정은의 마음)이라 했고, 대변인은 "민주당이 북한 대변인을 자처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한미일 연합훈련을 합의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친일 국방의 기획자"라고 역공했다.
태극기의 나라를 보전해야 할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욱일기의 친일세력, 인공기의 종북세력으로 낙인 찍는다. 대한민국 집권여당과 제1야당이 친일과 종북세력이라면 지금까지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는 것이 기적이다. 분명하고 자명해야 할 것은 국민의힘은 친일세력이 아니고 민주당은 종북세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친일, 종북 프레임은 정략적 의도로 창안된 가상현실일 뿐이다.
프레임에 이재명 의혹·이대준 비극 사라져
핵무장국 北 미사일 '펑펑'… 위기 인식 못해
문제는 정치권이 연출한 가상현실이 워낙 정교해 국민들의 몰입감이 대단한 점이다. 정당들의 적대적 대치는 가상의 프레임에 지지층을 가둔다. 세트에 갇힌 국민들은 현실을 구성하는 사실과 진실에서 격리된다. 정치보복 프레임에 이재명의 의혹들은 사소해지고, 북한이 살해하고 소각한 이대준의 비극은 사라진다. 급기야 핵무장국 북한이 미사일을 펑펑 날리는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연평도가 가상현실 너머에 있는 진짜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영화 '트루먼 쇼'는 투르먼이 세트의 문을 열고 가상현실을 벗어나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북한의 오판으로 가상현실이 깨진다면, 바로 그 순간이 대한민국의 파국이요 종말이다. 엄연한 현실인 북한 핵에만 집중해야 한다. 대칭 전력 확보 이외엔 살 길이 없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