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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 보자. 경기를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아주 오랫동안 진행한다. 그 결과 어느 한 편이 계속해서 이기고 다른 한 편은 계속해서 진다. 그리고 그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지속한다면 어떤 판단을 하는 게 상식적일까. 성실하지 못하거나 실력이 모자란다고 패자를 탓하거나 승자는 경기에서 이겼으니 모든 권리를 누릴 권리가 있어 마땅하다고 해야 할까. 과연 다른 상상을 해 볼 수는 없을까. 계속해서 어느 한 편이 이기거나 다른 한 편이 지는 이유가 혹시라도 경기의 규칙을 잘못 설계해서 그런 것은 아닐지를 말이다.

아이들의 놀이를 보면 흥미로운 장면을 만날 수 있다. 어느 한 편이 계속해서 지면 아이들은 규칙을 바꾼다. 보통은 진 쪽에서 제안한다. 때로는 이긴 쪽에서 먼저 나서기도 한다. 이렇게 규칙을 바꾸는 과정은 일종의 보정이다. 지금까지의 결과가 앞으로도 반복하여 나타나리라는 예측이 충분한 상황에서 아이들의 이러한 선택은 지금까지의 놀이 규칙에 문제가 있었다는 인정이다. 진 쪽이나 이긴 쪽이나 모두 인정하게 되면 소위 기울어진 운동장을 좀 더 평평하게 하는 새로운 규칙으로 놀이를 이어가게 된다. 만약 규칙 바꾸기를 합의하지 못하게 되면 놀이판 자체가 멈춘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 앎이야말로 규칙 너머의 규칙이 아닐 수 없다. 


'정희정' 돌봄의 고립 단면을 전해
위험 사회 진입했으나 규칙은 여전
사람과 사람 관계는 말라비틀어져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경기는 어떠한가.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를 경기의 규칙에 비유해 보자면, 사회의 공공복리는 경기의 결과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경기의 결과로 나타나는 복지에 문제가 있고 그 수준이 심각하며 앞으로도 개선할 수 없는 것으로 예측이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지금의 규칙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물어야 하며, 어떻게 재설계하여야 삶의 수준이 나아질지 다투어야 마땅하다. 놀이판 아이들의 지혜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그렇지 못하면 놀이판이 멈추듯이 사회가 멈출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연극 '정희정'(윤혜숙 연출, 10월3~9일,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은 돌봄이 점차 형벌이 되어가는 우리 사회를 그리고 있다. 우리 사회가 돌봄 위험 사회로 진입한 지 오래되었으나 지금까지의 규칙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오히려 돌봄을 시장에 넘겨버리는 바람에 상호 연결된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말라비틀어지고 있으나 돌봄시장은 살집이 포동포동하게 오르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돌봄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다"는 연극의 대사는 돌봄의 몫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떠넘겨버림으로써 돌봄의 순간이 단절과 고립의 신호탄으로 다가오는 사회의 단면을 단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처럼 무감각과 무관심으로 개개인을 사회로부터 단절하도록 방치한 결과를 시장이 장악해가고 있다. 그로 인해 누구는 돌봄의 순간이 찾아와도 이전과 같은 일상의 시간을 그대로 유지하지만 다른 누구는 이전과 같은 삶의 시간으로 결코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돌봄은 늘 상호 돌봄이다. 개인과 사회가 분리된 채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는 것처럼, 돌봄은 언제나 서로 돌봄의 사회적 상호 의존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아빠의 아빠가 됐다'의 저자인 조기현이 "아빠가 죽으면 형벌이 끝나고 해방되는 걸까?"라고 한 물음이나, 한겨레신문 칼럼 '6411의 목소리'에서 이레가 한 "종종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오롯이 나만 남겨진 삶은 어떨까?"라는 물음에 답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사회가 답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규칙이 잘못된 것이라고 답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상호 의존의 사회가 작동할 수 있도록 새로운 규칙을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멈춰 선 것이나 진배없다.

상호 의존 사회 작동은 '정치' 필요
더 좋은 규칙 만들어 더 나은 세계로

연극 '정희정'은 상호 의존의 사회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보다 더 좋은 규칙을 만들어서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정치의 역할이다. 경기의 규칙을 정하는 것이 정치의 일이고 그 규칙의 결과가 바로 복지의 수준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