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쇠락을 틈타 한반도를 강탈한 일제는 한민족의 역사를 지우려 했다. 일제강점기, 문화·역사 유적은 야만적 침탈의 표적이었다. 정조가 극진한 효심으로 지은 화성행궁(華城行宮)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궁내 주요 건물을 초토화하고 근대식 건물을 세워 학교와 관공서, 의료시설 용도로 사용했다. 남창초교와 쌍벽인 신풍초교는 궁내 객사(客捨) 자리에 지어졌다.
1980년대 후반, 수원문화원을 중심으로 '화성행궁 복원 추진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기 위한 첫 단추를 뀄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수원시는 복원사업을 본격화 했다. 문화원장을 지낸 심재덕 전 수원시장이 앞장서 지휘했다. 시는 행궁터 건물과 토지를 사들여 철거한 뒤 본래의 건물 양식으로 재건했다. '화성성역의궤'를 토대로 2003년 봉수당, 득중정, 궁녀와 군인 숙소 등 482칸의 복원이 완료됐다. 현재는 2단계 복원사업이 진행 중으로, 내년 하반기 완공될 전망이다.
지난주 화성행궁 터에서 우화관(于華館) 중건(重建) 상량식이 거행됐다. 광교신도시로 옮겨간 신풍초교 옛 자리다. 길놀이 풍물공연으로 흥이 오르고, 전례에 따라 고유제(告由祭)와 상량문 봉안 순으로 진행됐다. 건물주로부터 상량문을 전달받은 도편수는 건물의 최상부 부재인 마룻대 홈에 상량문을 봉안했다.
우화관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이라는 글자를 새긴 나무패를 모신 객사로, 1789년 궁내에 가장 먼저 건립된 건물이다. 처음엔 지역 명칭을 따 '팔달관(八達官)'이라 불렸으나 1795년 을묘년 행차 때 정조의 명에 따라 우화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서울로 들어가는 관청'이란 의미로, 수원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부유하고 즐겁기를 바라는 정조의 따뜻한 마음이 담겼다는 해석이다.
2단계 복원사업이 끝나면 화성행궁은 온전한 옛 모습을 되찾게 된다. 정조에 이어 순조, 헌종, 철종, 고종이 융건릉에 참배하고 들러 묵은 역사를 품었다. 조선 행궁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답다. 조선 후기 정치·군사·사회·문화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자산이다. 수원화성과 어우러진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사도세자와 혜경궁을 향한 정조의 효심이 '전통과 첨단산업이 공존하는' 수원의 자랑이 됐다.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