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명이 넘는 꽃다운 청춘을 앗아간 이태원 압사 참사를 MZ세대의 현상이라거나 우연한 사고로 치부할 수 있을까. 참사 원인을 '제도의 부재' 탓으로 돌린 정부 당국의 초기 대응이 여론의 뭇매를 맞은 건 이태원 참사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흐른 사회재난이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정부와 지자체 당국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첫 '노 마스크' 핼러윈 축제로 역대 최대급 인파가 밀집하리란 점을 예측하고도 철저히 준비하지 않았다.
3년 동안 팬데믹으로 억눌린 젊은이들의 축제 욕구가 분출될 조짐은 참사 전부터 나타났지만, 당국은 사전 대응을 소홀히 했으며 참사 직전 최후의 경고였던 시민들의 112신고마저 사실상 뭉갰다. 팬데믹 이후 예견된 사회 변화상을 간과한 것이다.
막을 수 있었음에도 제도 탓만
정부 당국 초기대응 여론 뭇매
대규모 인파 철저히 준비 안해
이태원 참사 직후 참혹한 현장 영상과 사진이 SNS와 유튜브, 모바일 메신저 단체대화방 등을 통해 빠르게 확산했고, 이를 보고 충격을 받은 시민들의 트라우마(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사회 문제로 번지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일 보도에서 IT(정보통신기술) 강국이자 초고속 통신망으로 연결된 '초연결사회'에서 사는 한국인들이 참사 이후 온라인으로 전파된 끔찍한 장면을 접하면서 공포감과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했다. 초연결사회의 부작용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지적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희생자를 향한 조롱, 젠더·세대 혐오 조장 발언, 가짜뉴스가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보다 더욱 노골적이고 심각하게 쏟아지고 있어 정부가 나서서 자제를 요청할 정도다.
전문가들은 팬데믹, 초연결사회, 젠더·세대 혐오, 기후변화, 글로벌 경제위기를 비롯한 사회 변화로 떠오른 새로운 기준 '뉴노멀(New Normal)'이 설정된 시대의 새로운 사회재난으로 이태원 참사를 진단하고 있다.
최후 경고 시민 신고마저 묵살
이미 '위험사회'로 진입한만큼
사회 안전망 근본적 변화 필요
지난 8월 서울 관악구 반지하 침수 참사 또한 도시 과밀화와 주거문제, 기후변화 위기 등이 복합된 뉴노멀의 단면을 보여준다. 시대 변화를 반영한 사회 안전망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시인문학자 김창수 전 인천연구원 부원장은 "그동안 우리가 접한 재난은 막을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요소가 있었던 반면 이태원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음에도 제도만 탓하며 국가와 지자체 전체가 마비됐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며 "초고속 성장을 한 고도성장국가 한국은 이미 '위험사회'로 진입해 곳곳에 위험 요소가 도사리지만, 위험사회라는 인식 자체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러한 상황에도 정부가 책임을 느끼지 못하고 정쟁이나 진영논리로 안전을 의도적으로 뒷순위로 밀고 있는 것도 문제"라며 "근본적 반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 관련기사 2·4·6면(축제·공연장 매뉴얼 있지만 '압사 사고' 안전 매뉴얼은 없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위험사회란?
위험이 사회의 중심 현상이 되는 현대 사회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1944~2015)이 제시한 개념. 울리히 벡은 과거의 위험이 자연재해나 전쟁 등 불가항력적 위험이었다면, 현대 사회의 위험은 정치·경제·사회 요소가 결합한 인위적 위험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