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마철 먹구름 짙은 하늘도 아주 잠시 한 줄기 햇빛을 허락할 때가 있다. 지난달 26일 봉화 아연광산 막장에 갇혔던 광부 2명이 4일 밤 극적으로, 그것도 제발로 걸어 생환했다. 그들이 빛 한줄기 없는 갱도에 갇혀 있는 동안 이태원 환한 밤 골목에선 156명의 청년들이 숨졌다. 대한민국 국가 애도기간에 북한은 사정없이 미사일을 쏘아댔다. 초대형 뉴스에 묻혔던 사람들이다. 간간이 이어진 구조 상황도 절망적이었다. 망각과 절망을 뚫고 그들이 지상에 발을 디딘 그날 밤은 대낮처럼 환했다.
2010년 칠레 대지진으로 구리 광산이 붕괴되면서 33명의 광부들이 갇혔다. 광부들이 모여있던 700m 지하의 갱도 대피공간에 구조대의 드릴이 17일 만에 숨통을 열었다. 광부들은 '전원 생존' 쪽지를 올려보냈고, 이들을 구조하기 위한 국제 공조가 작동했다. 교황은 묵주를, 미 항공우주국(NASA)은 특수 식량을, 스티브잡스는 아이팟을 내려보냈다. 33명이 미국 기술자들이 뚫은 구조 터널로 69일 만에 지상에 도착하자 전 세계가 환호했다.
칠레 때처럼 봉화에서도 본능적인 생존 의지가 광부들을 살렸다. 반드시 살아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헤드랜턴을 의지해 직접 곡괭이로 탈출 갱도를 팠고, 발파도 시도했단다. 가지고 있던 커피믹스 30봉을 나누어 먹으며 체력을 유지했고, 비닐하우스를 치고 모닥불을 피워 체온을 유지했다. 노련한 광부 박정하씨는 광부 이력 며칠에 불과한 보조작업자와 체온을 나누며 구조대를 기다렸다.
인체는 신비하다. 극단적인 위기 속에서도 생존을 향한 본능이 작동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 갇혔던 박승현씨는 음식은 커녕 물도 없이 견디다 17일만에 구조됐다. 봉화 광부들을 살린 것도 커피믹스가 아니라 그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힌 의지와 지혜였다.
무너진 광산 지하에서 두 광부가 생존 의지를 불태울 때, 지상의 번화가에선 156명의 희생자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너진 치안 조직에 압사당했다. 위기는 기적을 낳았고, 고장난 제도는 비극을 불렀다. 이렇듯 얇디 얇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생각이 많아진다. 고장난 제도와 조직이 무너진 광산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