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나라 경찰 수뇌부의 집단 무의식이라니, 불가사의하다. 전 정권에서 멀쩡했던 경찰 수뇌부가 현 정권 들어서 갑자기 '뇌송송 구멍탁'이 된건가. 그럴리 없다. 경찰 수뇌부를 무능한 백치로 만든 퇴화과정이 의심된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정치이다. 정권이 경찰 수뇌부를 입 맛에 맞게 구성하고 수족처럼 부렸던 역사가 유장하다. 독재정권 보위를 위해 대학생을 고문해 죽이고도 "책상을 탁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한 정치경찰의 전설이 민주화 이후 정권들에서도 세련되고 교묘하게 계승됐다.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을 수사 지휘했던 서울경찰청장은 정권 실세인 김경수 의원을 두둔했다가 사과했다. 지방선거 직전 야당 시장 비서실을 압수수색한 울산지방경찰청장은 여당 국회의원이 됐다. 지난 정권 때의 일이다. 일선 경찰관들이 파출소와 범죄현장에서 민생치안에 전념할 때 경찰 고위 간부들은 정치를 한다. 새 정부의 경찰 지휘부라고 다를리 없을 테다. 이태원 참사는 대한민국 경찰 참사이다. 시민들은 압사했고 경찰은 무너졌다.
일선 경찰 현장 뛸때 고위간부들은 '정치'
이태원 참사… 시민들 압사·경찰은 붕괴
정치 오염으로 인한 국방 신부전 증상도 심각하다. 북한이 지난 2일 발사한 탄도미사일이 최초로 NLL 남쪽 속초 앞바다에 떨어졌다. 정부는 미사일이 향하는 울릉도에 공습경보를 발령했다. 훈련이 아닌 실제상황이었다. 울릉도 국민들은 대피하지 못했다. 대피소 위치를 몰랐다. 공무원들만 신속하게 대피했다. 공습경보가 해제되고 경계경보가 발령됐다. 경계 일선의 책임자인 울릉경찰서장은 관사로 퇴근해 텃밭에서 상추를 뜯었다. 공습경보 땐 공무원이 주민들 먼저 대피하고, 경계경보 땐 경찰서장이 퇴근해 텃밭에 쭈그려 앉았다.
북한 미사일이 실제 위험했던 곳은 속초 앞바다 어장이었다. 공습경보는 속초시와 어장에서 조업중인 어선들에게도 발령됐어야 했다. 경보가 필요했던 국민들에겐 경보가 없었고, 낙탄 지점에서 거리가 멀었던 울릉도에선 웃픈 코미디가 펼쳐졌다. 실제 상황이었다면 치를 떨 잔혹극이 벌어졌겠다.
북한의 핵무력 앞에 세계 6위의 군사력은 허세다. 미국에 실질적인 핵우산을 조르고, 싫어도 일본 해군과 연합훈련을 해야 겨우 균형을 맞출 정도이다. 이런 국가의 국민이 전시 대피 요령에 문맹이다. 2010년 연평도 포격전 직후 전방 국민 대피소를 완비하겠다던 약속도 예산도 사라졌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국방부의 시계는 멈추었다. "우리 공무원이 북한군에 소각됐다"며 적개심에 불탔던 국방부 발표가 며칠 뒤 "소각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누그러졌을 때 알아챘어야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냉·온탕을 오가며 진땀을 흘린 탓에 국방부는 녹초가 됐다.
정권 바뀔때마다 진땀 흘린 국방부 '녹초'
보수·진보 싸움 나라근간·제도 정치에 오염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지향을 상실한 보수와 진보 정당이 정권을 주고 받으며 적대하는 동안 나라의 근간과 제도들이 정치에 오염됐다. 경제적 위상에 기대어 선진국입네 자부했지만 대들보는 주저앉고 서까래는 썩고 있었다. 조국은 대한민국을 '가불 선진국'이라 했지만 실상은 최면 선진국에 불과했다.
처참한 치안 부재, 현실적인 안보 불안, 자원 부족 경제의 한계 등 잘 나갈 때 안보였던 내부의 위기들이 어깨동무했다. 정치가 협력하고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대처할 총체적 국난이다. 그러나 오염원은 지치지 않는다. 이태원 참사와 북한발 미사일 소나기에도 촛불을 켜려는 세력과 끄려는 세력들이 본격적인 한 판을 벼르고 있다.
대한민국 정치가 협력할 수밖에 없는 위기를 상상해본다.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