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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영문학의 3대 비극으로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그리고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꼽는다고 한다. 비록 '비극'이라는 장르적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단호한 규정은 멜빌의 남다른 문학사적 위상을 말해주는 사례일 것이다. 세계의 지성들도 이러한 찬사에 뜨겁게 가담한 바 있다. 영국 작가 로렌스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멜빌은 세계가 두려워하는 작가다. 우리는 지금도 그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라고 일갈했고, 미국 비평가 루이스 멈포드는 "멜빌은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하나다. '모비딕'은 셰익스피어의 '햄릿', 단테의 '신곡'에 맞먹는 수준의 문학작품이다"라고 칭송하였다. 그만큼 멜빌 혹은 '모비딕'은 세계문학사에 찬연한 이름으로 우뚝하다.

월가이야기 소설 '필경사 바틀비'
주인공 권력 지침 명령 단호히 맞서
체제 비동일화 자신을 지키는 저항


멜빌은 1819년 뉴욕에서 태어나 1891년 그곳에서 타계했다. 온전한 19세기 작가인 셈이다. 그는 스무 살 때 상선을 타고 바다에 처음 나섰고, 포경선을 타고 4년 동안 남태평양을 누비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를 일찌감치 '모비딕'의 작가로 예약해놓게 된다. 그의 나이 서른둘에 창작된 '모비딕'(1851)은 이슈마엘이라는 1인칭 화자에 의해 관찰되고 기록된 포경선 일지이다. 에이허브 선장은 거대한 흰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후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간다. 선장의 광기와 절대권력, 고래와의 사투 끝에 난파되는 포경선, 모든 선원이 수장되는 가파른 서사 안에는 수많은 기독교 성경의 인유(引喩)가 담겼고, 형이상학으로부터 백과사전적 지식의 세계까지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문장과 스타일이 장착되었다. 그러나 당시 독자들은 전혀 이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 작품의 형이상학적 면모가 재평가되면서 '모비딕'은 작가 사후에야 그 의미와 가치가 재발견되어 미국문학 최고 걸작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모비딕' 이후 2년 만에 발표된 중편소설 '필경사 바틀비'(1953)는 지금도 세계적으로 많이 읽히는 19세기 소설의 고전이다. '월가 이야기'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미국 금융경제의 중심인 월스트리트를 배경으로 하여 당시 새롭게 움트고 있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았다. '벽의 거리'라는 이름이 환기하듯 '월가'는 멜빌이 뉴요커였기 때문에 훨씬 실감있게 접근할 수 있었던 소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그러한 표층서사 밑으로 어떤 심층서사가 흐르고 있다. 그것은 '남은 자(the Remnants)'로서의 바틀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권력의 지침을 함축하는 명령에 대하여 주인공은 한결같이 비타협적으로 대응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기이하면서도 절묘한 표현을 통해 '남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음각해가는 필경사의 운명은 지금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던져준다.

당연시한것 거부 스스로 죽음 맞아
우리의 현실에 필요한 현상 아닐까


이 소극적 항변은 물리적 투쟁과는 구별되지만 체제와 비동일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지키는 신성한 저항적 행위로 나타난다. 이러한 바틀비의 생애는 자본과 노동, 율법과 사랑, 삶과 죽음의 문제 등 수많은 대립 쌍들을 환기해주는데 가령 이 작품은 '필경사=작가'라는 등식을 개입시키면 한 편의 빼어난 '예술가소설'이 되기도 한다. 어딘가 어두워 보이고 말이 없는 그의 모습은 '필경(筆耕)'이라는 말이 함축하듯 작가의 은유적 형상으로 모자람이 없다. 관례를 벗어난 그의 명령 거부는 작가의 특권인 자유와 독립성을 이렇게 선명하게 상징한다. 결국 해고되지만 사무실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구치소에 넘겨진 바틀비는 그곳에서 벽을 마주한 채 죽음을 맞는다. '열린 벽'인 월가에서 격리되어 '닫힌 벽'인 감옥을 택하여 스스로 사라져간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시종 거절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러한 형상은 이 소설을 '모비딕'처럼 종교적 서사로 읽히게끔 해주기도 한다.
 

바틀비의 이러한 저항은 권력, 자본, 합리성, 주류, 율법을 향한 것이었다. 그렇게 이 소설은 미국사회의 반영체이자 형이상학적 심연으로 170년 시간을 건너오고 있다. 왠지 우리 시대의 위대한 거절도 이렇게 나타나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새삼 되뇌어본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