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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부천시가 올해 수주(樹州) 변영로를 기념하는 수주문학관을 열었다. 별도로 세운 기념관이 아니지만, 고강동 선사유적지 공원 내에 수주도서관을 개관하면서 2층에 변영로 시인의 삶과 문학을 조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부천시에는 변영로를 기념하는 다리, '변영로교'와 그의 작품 이름을 딴 공원인 '봄비공원'도 있다. 변영로에 대한 부천 문인들과 부천시의 관심은 그가 남긴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것이지만, 그의 아호 덕도 크다.

그런데 '수주'는 변영로의 것이 아니라 본래 그의 큰형 변영만의 아호였다. 변영만은 우당(遇堂), 곡명(穀明), 산강(山康)을 비롯한 여러 이름을 썼는데 그중 가장 아끼는 것이 수주였다. 변영만의 절친이었던 벽초 홍명희는 수주라는 아호를 쓰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수주'와 같은 큰 땅이름을 개인 이름으로 삼는다는 것은 '과대망상증'이 아니냐고 질타했다니 벗의 아호에 대한 품평으로는 의외이다. 옛 문인들 가운데 자신이 태어난 향리나 인근의 산천명을 아호로 삼은 예가 적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너무 큰 땅을 아호로 삼아 이를 자대(自大)라고 보았거나 지방주의나 향토주의에 대한 특유의 경계심이 발동되었을 수도 있겠다. 


원래 '수주'는 변영로 큰 형 변영만의 아호
부천 옛지명 정의 '민족문화대백과' 고쳐야


벽초는 변영만을 '수주'라 부르지 않고 '우당'이라고 불렀지만 변영만은 '수주'를 고수했다. 변영만이 스스로 부평군의 고려시대 때 지명인 수주로 불리기를 자처한 이유가 고향 땅이 주는 아늑함과 함께 '나무와 숲의 땅'이 지니는 깊고 무성하고 그윽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렇지만 '수주'라는 아호를 양도해 달라는 동생의 갑작스런 요구에는 무너지고 말았다. '수주'를 달라는 요청에 형이 얼마나 곤혹스러웠던지 '약 오륙 분' 동안이나 주저했지만 결국 수주를 동생의 요청대로 양도한다.

'수주' 아호를 놓고 '오륙 분' 갈등했던 1928년 초의 사건을 ''수주'라는 별호를 아우 영로에게 양도하면서'라는 수필로 남겨두었는데 행간 곳곳이 동생이 수주라는 호를 받기에 부족하다는 생각과 아쉬움이다. 변영만은 10편으로 이뤄진 연작 시조 '손돌의 죽음'을 남기고 있는데 여기서도 옛 인천지역에 대한 관심이 묻어난다. 어쨌거나 이날부터 '수주'는 동생 차지가 되고 형은 뚜렷한 아호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수주'를 경기도 부천지역의 옛 지명이라고 정의한 '민족문화대백과'의 언급은 고쳐야 한다. 인천시의 부평, 계양 지역과 경기도 부천시는 오랫동안 하나의 문화권역으로 고구려 때 주부토군, 신라때는 장제군이 되었다가 고려 초에 수주로 개칭되었으며 계양으로 고쳤다가 고려말에 부평으로 명명된 기나긴 땅이름의 역사가 있다. 지금의 부천시는 부평과 인천에서 한글자씩 따서 명명한 부천군의 일부였다. 부천군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평군과 인천부의 농촌지역, 남양군의 도서까지 통합한 거대한 행정구역이었다. 1973년에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그 일부였던 오정면과 계남면 지역이었던 소사벌을 분리하여 부천시로 만든 것이다. 즉 지금 부천시가 옛 부평과 무관하지 않지만 천년 전 고려 때의 수주를 부천시의 옛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논리적 비약이다.

천년전 고려때 수주 옛이름은 논리적 비약
'부동산시대' 가치 찾아내 아껴쓰는게 임자


그러고 보니 지금의 부평구와 옛 부평도호부의 중심지였던 계양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수주 아호 양도기나 부평 지명 전말기를 보면 문득 형만한 아우 없다는 말도 있지만, 아우 이기는 형도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또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땅과 집에 다걸기를 하고 있는 부동산 시대를 살고 있어 그렇지 따지고 보면 물이나 공기처럼 땅의 주인, 하물며 땅이름의 주인이 따로 있을 수 있겠는가. 가치를 찾아내고 아껴 쓰는 사람이 임자다. 수주라는 이름도 형이 찾아 닦은 이름이고 아우 변영로가 빛낸 이름이니 중씨 변영태와 함께 이들 3형제를 '부평3변(富平三卞)'이라 부르는 것이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