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양말 편집숍 홈페이지에도 처음으로 들어가 봤다. 매일 신기 좋은 양말부터 국내외 디자이너 브랜드의 시즌 컬렉션 양말까지 핫한 제품들을 선별해 소개한다는데 양말만으로 이렇게 다채로운 구성이 가능하다니, 그야말로 신세계가 열리는 느낌이다. 오프라인 양말 편집숍 매니저 '재인'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양말을 고르고 사서 신는 과정, 그 자체가 좋다"는 이 매니저에 따르면 양말을 골라 신는 것이 "일상에 좋아하는 것을 하나 더 더하는 삶. 집을 나설 때 공들이는 부분이 하나 더 생기는 삶. 그것이 하루를 명랑하게 만든다"고 한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양말 선물 덕분에 예쁘고 질 좋은 양말을 골라 신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더 기분을 좋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됐다. 날씨와 그날의 일정, 내 기분까지를 생각하면서 오늘은 뭘 신어볼까 고민하는 짧은 순간의 즐거움이란! 그런 고민할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고민을 하라고 잔소리할 사람도 있겠지만, 원래 인생은 계산이 정확한 수학이 아니니까, 일상에서 매일 하나쯤 별 거 아닌 고민을 하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양말에 꽂힌 이유 이태원 참사 때문
혼란스러울수록 삶 지키는 것 중요
재난속 자유로운 사람 누가 있을까
내친 김에 작가가 아주 좋아하는 한 가지 대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아무튼 시리즈' 중의 한 책인 '아무튼 양말'까지 찾아 읽었다. 지네도 아닌데 양말을 88켤레나 갖고 있는 저자의 양말 이야기다. 양말로 뭐 할 이야기가 있다고 책까지 쓰나 싶었는데, 푹 빠져 읽다가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지나칠 뻔했다.
사실 양말 선물을 받은 지 한 달이 좀 넘었는데 조금 늦게 양말에 꽂힌 이유는 따로 있다. 여전히 현실로 믿어지지 않는 이태원 참사 때문이다. 실제 일어났다고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나름대로 해보면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뭔가 없었던 일처럼 흘러가는 느낌이 드는 이 와중에, 견디는 중이라고 생각하며 지내고 있지만 가끔씩 맥이 탁 풀리거나 멍해지기도 하고,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이 맞는 애도인지조차 잘 모르겠다. 혼란스러울수록 일상을 지키는 것,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는 것, 일상에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기쁨을 느끼고 그 순간을 즐기는 것, 기쁘지 않은 상태라도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국종 아주대 교수가 "구내식당의 점심 반찬이 잘 나온 것과 같은 사소한 일에라도 행복을 느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겸손한 마음으로 소소한 즐거움과 같은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아가야 우울증을 간신히 견디기라도 할 수 있다"라고 했던 것처럼, 지금의 나에게는 양말이 작은 행복을 주는 셈이다.
공연예술이론가 목정원의 책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동시대인이라는 말의 가장 적합한 정의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시대를 견디며, 시대를 견디지 못한 이들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그리하여 어떤 죽음들에 대한 기억을 설명 없이 나누는 사람들. 함께 웃는 사람들이기보다, 함께 웃지 못하는 사람들. 무언가가 좀처럼 웃기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아무것도 하기 싫거나 할일 많아도
신으면 하루 시작… 벗으면 마무리
재난과 참사가 잦은 근래의 한국 사회, 이 정의에서 자유로운 '동시대인'이 누가 있을까 생각한다.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틈에 섞여, '때로 관객이 되지 않고는'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기에, 양말이라는 지극히 사소한 일상의 단편이 더 소중하다. 결국 사람의 인생은 일상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아무튼, 양말'의 구달 작가 말처럼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든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인 날이든, 어쨌든 양말을 신으며 하루는 시작되고 양말을 벗어 던지면 어떻게든 마무리"되니까.
/정지은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