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를테면, 다들 현관문을 열어둔 복도식 아파트, 가족들이 각기 외출하면 엘리베이터 출입구마다 한 분씩 계시는 경비아저씨에게 집 열쇠를 맡겨두는 풍경, 주차장의 차 사이에서 축구를 하는-당연히 주차한 차들이 공에 맞는 일이 비일비재한-초등학생들, 하교 후에 비어있는 나의 집 대신 친구 집에서 저녁까지 놀다가 친구 어머니에게 저녁밥을 얻어먹는 장면 등.
게시글 밑으로는 어떤 이들은 과거를 추억하고, 어떤 이들은 현재의 도시에서 상상하기 힘든 모습들에 놀라는 댓글들이 달리곤 한다.
도시, 수십년새 빨라지고 넓어져
수많은 사람·직업 '경쟁' 명목 도태
이해득실 넘은 '당위의 세계' 눈길
도시의 삶은 수십 년 사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넓어졌다. 도시에서 접하는 콘텐츠와 서비스, 상품의 지리적인 범위의 한계가 없어졌고, 시간적 한계 또한 마찬가지다.
수십년 전 '세계화'는 수출할 수 있는 국가가 늘어나고 해외 기업의 간판을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정도의 감각이었다면, 현재의 '글로벌'은 나의 삶의 모든 시간을 항상 세계 어딘가에 연결시킬 수 있는 정도로 진화했다.
개인이 글로벌과 직접 연결될수록 지역공동체는 사라지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지역공동체의 역할이 줄어들면, 글로벌 사회구조가 지역에 부여한 역할에 부합하지 않는 수많은 직업과 사람들이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때로는 이것을 '경쟁력 강화'라고 부르며 옹호한다.
1998년 이후, 우리는 인천에서도 노동과 개발 현장에서 수없이 많은 배제를 겪어왔음에도 때로는 '첨단'과 '미래'를 표상하는 슬로건 속에서, 때로는 앙등하는 아파트 가격을 바라보며 이 배제를 묵인했고, 때로는 배제되는 이들이 미래에 적합지 못해 도태되고 있다고 격하해왔다.
국민국가와 공공이 시민 하나하나를 보듬는데 소홀했을 때, 때로는 신자유주의에 앞장서서 시민을 경제구조에서 밀어내는 데 동조했을 때, 종교는 비효율적일 수도 있는 방법들로 이들을 다시 사회구조 안에서 자리 잡도록 도와왔다.
종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배제된 이들을 다시 일어나도록 연대하였고, 자연이 도구화되는 것을 막아왔다. 지역공동체가 역할을 잃어가는 동안, 그 불씨를 최대한 지켜온 한 축이 종교계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종교계가 배제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사회적 경제와 연대를 행할 수 있는 이유는 물론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그들의 '사회교리' 때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사회교리'를 만들어내도록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종교는 합리와 이해득실의 세계 속에서 몇 남지 않은, '얼마나 이득인가'보다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를 먼저 묻는 '당위의 세계'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치를 비롯한 모든 세계가 더 단기적인 이득을 향해 매몰되는 동안, 종교는 사람을 신념과 믿음을 위해 손해를 감수할 수 있도록 만드는 희소한 공간이다.
유럽의 선진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도시민 중에서도 점차 종교가 없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일 것이다.
점점 더 개인에게 더 빼곡하고 합리적인 삶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90년대 아파트의 공동체성을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현대에 잘 적응하는 삶의 가치관 속에 당위의 영역이 자리 잡을 가능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이 책 속에서도 종교가 시작한 환경운동과 사회적 금융은 점차 쇠퇴했거나, 자본시장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어 간다. 현대의 주류사회에서 앞서가기는커녕 생존하려고만 해도 당위의 세계는 점차 쪼그라든다.
인천학연구원에서 편찬한 이 책은 작년부터 시작해서 올봄까지 출간된 총 3권으로 이루어진 도시공동체 연구총서의 연작 중 하나다.
세 책은 공히 오늘의 도시민이 지역공동체를, 그리고 당위의 세계를 자의로 내려놓았는지, 빼앗기고 있던 것인지 깊게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 사유하고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도 피어난다. 이들이 도시의 삶이 기울어지지 않도록 한 축을 버텨주고 있기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