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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 그토록 책에 탐닉한 것은 심오한 뜻이 있어서기 보다는 책이 재미있어서였다. 책에서 나오는 교향(交響)의 장엄함 속에서 내 영혼은 더욱 깊고 굳세졌다고 믿는다. 청소년기에는 친구 집의 다락방에서 구한 책들을 읽고, 전업 작가가 되어서 그 수입으로 생계를 해결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 20대 초에는 시립도서관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책을 읽었다.

내 인생의 선택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은 책과 함께한 삶이다. 내 행복의 조건은 책, 의자, 햇빛이다. 그것에 더해 사랑하는 사람들, 숲, 바다, 음악, 대나무, 모란, 작약이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없다고 믿었다. 책에는 가보지 못한 세계, 낯선 장소와 풍경들, 미지의 시간들이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지적 모험을 시작한다.

누군가는 책 읽기를 '눈이 하는 정신 나간 짓'이라지만 아무리 소박하게 보더라도 책 읽기는 항상 그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우리는 책을 통해 세상과 '나'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구하고, 교양과 지식을 갖춘 지성인으로 성장한다. 책을 읽는 사람은 뇌의 시각 피질이 달라지고 문자나 문자 패턴, 단어 등 시각적 이미지를 떠맡는 뇌의 세포망이 채워져서 지적 자극을 효율적으로 신경회로에 전달하는 능력을 갖춘다. 또한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기쁨을 느끼고, 옳고 그름에 대한 윤리적 감각이 발달한다. 한 마디로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한다.

공자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좋아하고 즐기는 것으로 이른 봄 종달새 소리, 모란과 작약 꽃들, 여름 아침 연못의 수련,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벗들과의 담소, 여인의 환한 미소, 동지 팥죽, 흰 눈 쌓인 겨울 아침의 햇빛 환한 것들을 꼽는다. 그밖에 고전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는 것, 벗과 바둑을 두는 것을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것들 중에서 으뜸은 책 읽기다.

뼈가 약하고 살이 연할 때 나를 단련한 것은 책이고, 인생의 위기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도 책이다. 스스로 낙오자가 되어 시골로 내려와 쓸쓸한 살림을 꾸릴 때 힘과 용기를 준 것도 책이다. 평생을 책을 벗 삼아 살았으니, 내가 읽은 책이 곧 내 우주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내게 다정함과 너그러움, 취향의 깨끗함, 미적 감수성, 올곧은 일에 늠름할 수 있는 용기가 손톱만큼이라도 있다면, 그건 다 책에서 얻은 것 이다.

내 인생의 큰 위기는 마흔 무렵에 왔다. 구속과 이혼을 겪고 시골로 들어왔다. 벗들은 멀어지고 생계 대책은 막막했다. 종일 저수지 물이나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새벽마다 노자와 장자, 그리고 공자의 책을 읽었다. 그 책들을 끼고 살며 마음의 고요를 되찾았다. '마흔은 인생의 오후, 빛은 따뜻하고 그림자 길어져, 걸음을 느리게 잡아당기면 곧 펼쳐질 금빛 석양을 기대하면서 잠시 쉬어가도 좋은 시간. 아침부터 수고한 마음을 도닥거리고 어루만지면서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지 평온하고 지혜롭게 사유하라. 그런 이에게 오후는 길고 충만하다'.(졸저, '마흔의 서재') 격류로 시작한 내 인생의 강은 어느덧 흐름이 느린 넓은 하류에 닿았다.

세상을 크게 이롭게 한 바는 없지만 삶을 조촐하게 꾸려온 이의 자긍심마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스무 살에 등단해서 쉰 해 동안 시를 쓰고, 방송에 나가 책 얘기를 하며, 매체에 글들을 기고했다. 독자에서 편집자를 거쳐 저자로 살아오며 기쁜 일도 궂은일도 겪고, 여러 풍파를 견디고 넘어왔다. 그동안 책이 준 혜택은 일일이 꼽을 수 없을 만큼 무량하다. 책 읽기 덕분에 내가 누구인지를 더 잘 인식하고, 영혼은 지식들과 융합하며 나는 사색하는 인간으로 성장했다. 나는 봉급과 수고에 매이지 않은 채 자유롭게 읽고 쓰며 밥벌이를 한 삶에 만족한다. 나는 '책 읽는 인간'으로 일관하며 살아온 것을 기꺼워한다. 그걸 내 자존의 고갱이로 여기고, 그걸 오롯이 보람과 기쁨으로 여긴 것은 그게 바로 내가 갈망한 단 하나의 삶인 까닭이다.

/장석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