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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우리 유미는 삼성에서 반도체를 만들다가 백혈병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고 황유미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늘 담담하게 말했다. 이 한 문장은 짧지만,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딸의 병명, 죽음과 원인, 직업 그리고 일했던 곳.

이 문장의 유미라는 이름을 수백명의 이름으로 대체하여 넣을 수 있을 만큼 많은 피해자가 있었다. 연기 나지 않는 공장, 세계 초일류라 주목받던 반도체 공정은 노동자들에게는 일류가 아니었다. 왜 반도체를 만들다가 이렇게 많은 이들이 아프거나 세상을 떠났을까. 이유는 노동자들이 공정에서 사용하던 화학물질 때문이었다. 독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날마다 노출되었다. 독성을 지닌 물질을 사용했지만, 그것이 유해하다는 것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화학물질의 독성은 노동자의 건강뿐만 아니라 자녀의 피해로 이어졌다.

삼성반도체 화학물질 독성
노동자 건강·2세 피해로 이어져


"나는 왜 아프게 태어났어?"

태어날 때부터 아픈 아이의 질문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뇌종양, 심장질환, 선천성 구순 기형, 선천성 거대결장, 재생불량성 빈혈, 면역결핍증후군 등. 삼성반도체에서 일했던 노동자 자녀 질환의 병명이다. 뱃속에서부터 또는 태어나면서부터 아이들은 아팠다. '엄마', '아빠' 세상에 말을 건네기 전부터 병원에 더 익숙해졌고, 크고 작은 수술을 반복했다. 왜 아이가 아플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일까. 남편일까. 원인을 찾고 서로 자책하는 일을 반복했다. 아이 질병의 원인을 찾고 싶었던 노동자들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에 제보를 해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아이가 아픈 원인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책임'이었음을. 노동자들이 공정에서 사용했던 유해화학물질 중 많은 수는 유산, 난임, 선천성 질환 등을 유발할 수 있는 생식독성을 띤 물질이었다. 특정 화학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필요한 보호장비, 안전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노동자들이 직업병으로 제보해 왔을 때 빠지지 않고 들어가던 이야기가 있었다. "생리가 멈췄어요. 생리통이 심해지고, 유산되는 일도 있었어요. 아이가 생기지 않는 일도요." 그저 아픈 과정에서 일어나는 증상이라 여겨지던 것들이 생식독성에 의한 문제라고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21년 5월, 노동자들은 아이들의 질병이 업무상 유해환경으로 인한 문제라는 것을 인정해 달라며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이 산재 신청은 부모의 노동환경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아픈 아이는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우리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말하기는 변화를 이끌어냈다. 2021년 12월 노동자 자녀들의 산재를 인정하는 일명 '태아산재' 산재보상법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내년 1월 본격 시행을 앞두고 있다. 왜 아프게 태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야 아이들에게 아픈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
 

'나와 같은 일을 다른 사람은 겪게 하고 싶지 않다'.

아이들 질병원인 유해환경 인정
일명 '태아산재' 법 개정안 통과
시행 앞뒀지만 여전히 갈길 험난


법이 만들어지고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험난하다. 지난 10월18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법의 시행령 때문이다. 태아의 건강에 미칠 수 있는 1천484가지 화학물질 중 산재 인정 기준을 17종만으로 협소하게 규정했다. 산재 신청 권한은 있지만 인정받기는 어려운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반도체 노동자 2세 질환을 담은 책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작가 희정이 만난 피해 노동자들은 "나와 같은 일을 다른 사람은 겪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한다. 이러한 말하기로 노동자들은 용기를 내고, 세상에 태아 산재 문제를 알렸다. 누군가의 경험이 2세 산재를 겪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시행령의 판단기준을 협소하게 하는 것은 앞으로 용기 낼 또 다른 누군가를 가로막는 일이다. 너무 오랜 시간 기다려 왔다. 고용노동부가 엉터리 시행령이 아닌 유해 요인을 폭넓게 인정하는 방향으로 실효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길 바란다.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