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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빵과 떡으로 기억되는 목사님과 스님이 있다. 목사님은 빵으로, 스님은 떡으로 사람을 기쁘고도 즐겁게 한다. 갓 구워낸 빵과 막 쪄낸 떡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삶을 살아가는 성직자다. 바로 이수기 목사님과 형석 스님이다. 이 목사님과 스님은 부처님 오신 날에 빵과 케이크를, 성탄절에 떡과 팥죽을 수년간 보내고 있지만 서로 얼굴을 모르는 사이다. 몇 번 만남을 주선하려고 했지만 두 분 모두 닮은 꼴처럼 웃는 얼굴로 사양했다.

이 두 분을 만난 지 10년이 흘렀지만 한 번도 전도나 포교를 강요받은 적이 없다. 심지어는 복무하고 계시는 교회나 사찰에서도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을 정도다. 목사님과 스님이 신심이 약해서가 아니라 타 종교에 대한 존중이며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서다. 나 또한 둘 중 하나의 종교를 가졌지만, 누구에게도 개인적인 신앙을 묻거나 말하지 않았다. 신앙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지는 것에 있다는 나름의 신념 때문이다.

물론 언어를 매개로 창작과 교육 그리고 현장 비평을 하는 나로서도 '말'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말·해·진·다는 것은, 자신의 선행과 악행이 타인의 입을 통해 가시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신앙인의 말은 특정한 종교를 대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실천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인의 실천이야말로 교리 외 교리를 가로지르는 데 있다.

이수기 목사님·형석 스님 선한 일
빵·떡으로 종교 가리지 않는 도움


이 실천은 그동안 종교가 수천 년 동안 존립할 수 있었던 이유다. 종교는 믿음을 원인으로 하는 신앙이지만 이 신앙의 실천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결과다. 그러므로 선듯 자신의 종교를 내보인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것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종교인을 인도하는 성직자들은 자신이 하는 말의 파급력을 무시하지 못하는, 반면 그 뜻에 충실하기 위한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 뜻은 신을 대리하는 자로서 사람들의 긍휼함을 대신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수기 목사님과 형석 스님은 종파와 지역, 국가를 떠나서 선한 일을 하고 있다. 이른바 빵과 떡으로 종교와 신념을 가리지 않고, 무신론자들에게도 필요하다면 마음을 채워준다. 이수기 목사님의 경우 지진, 태풍, 전쟁 등 재해가 난 국가 및 후진국에 설교 대신 빵을 보내고, 빵 만드는 기술과 장비들을 보급한다. 형석 스님 또한 외국인과 노인들이 많이 사는 후미진 마을 사람들에게 법문 대신 봉사를 한다. 가르치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과 부처님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마치 빵과 떡과 같이.

빵과 떡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문화와 함께 진화해 왔다. 추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의 생명과 공동체 화합의 중심에 빵과 떡이 있을 정도로 소중한 음식이다. 이러한 음식의 변신은 곡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쌀, 보리, 옥수수 등의 곡물을 갈고, 삶고, 튀기는 공정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몸으로 생명을 키울 수 있는 것처럼. 종교인도 타인을 위해 스스로가 낮아지고, 섞이고, 녹아들 때 부드럽고 달콤한 종교의 맛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자신이 가진 종교의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을 던져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데 있기에 결단코 녹록지 않다.

가르치지 않는 가운데 말씀 실현
이런 사람 냄새는 분명 신의 향기


이같이 기독교와 불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종교에서 유사한 비유가 넘쳐난다. 이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거짓과 위선이라는 욕망을 통과해서 보여지는 진리의 언어다. 성경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구절과 법구경에 "아름다운 꽃이 두루 널린 곳에서 멋진 꽃다발을 만들 수 있네. 생애 온갖 착한 업을 쌓아야 하리"라는 구절이 있다. 빵과 떡은 하나님의 아들로 살기 원하는 자들이 피어 올린 백만 송이 꽃이다. 이런 꽃밭에서 나는 사람 냄새는 분명히 신의 향기일 것이다. 선함에는 말이 필요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