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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연극 '등장인물'(신재 연출, 11월 16~20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은 그 제목이 독특하다. 제목 앞에 '아직 등장하지 않은'이라는 작은 글자가 붙어 있다. 그러니까 '아직 등장하지 않은 등장인물'이 정확한 제목이다. '아직 등장하지 않은'이라는 제한이 붙어 있는 이유를 짐작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처한 환경을 생각해보면 그 의미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공연 내용은 단순하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직접 가사를 쓴 '시원한 여름'과 '사랑의 마음'에는 그들의 소망과 마음이 담겨 있다. 바다에 가고 싶고, 물놀이도 하고 싶다. 소박하다. 그러나 '바다에 가요'라는 가사가 그들에게 얼마나 힘겨운 숙제인지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들에게 사랑의 마음은 친구들이 다칠까 봐 도와주는 마음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줄게요. 마음을 다 주면 그 사람도 알겠죠'라고 노래한다.

연극 '등장인물'의 출연자들은 중증발달장애인이다. 출연자가 장애인이라서 공연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장애인 연극이 전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지원사업으로 장애인 당사자가 출연하거나 창작하는 여러 작품이 매년 꾸준하게 무대에 올라가고 있다. 연극 '등장인물'이 특별한 것은 그 중심에 해방을 향한 실천이 있어서다. 출연자는 2~3년 전부터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시작했으며, 그중에는 시설에서 38년을 지낸 분도 있다고 한다. 최근 탈시설 운동이 확산하면서 지역사회가 함께 돌보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자립과 의존에 관한 낡은 관점에서 벗어나 상호의존의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세상이 장애인용으로 돼 있지 않으니 장애인은 의존할 수 있는 것이 무척 적습니다. 장애인이 너무 의존하는 게 아니라 의존할 게 부족하기 때문에 자립이 어려운 겁니다. 인간은 약함을 서로 보충하고 의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서 강해졌어요. 장애인만 의존하지 말라는 것은 이상한 이야기입니다"(구마가야 신이치로)라는 말은 얼마나 명확한가. 자립과 의존의 낡은 이분법을 넘어서 상호의존하고 있는 관계망을 확장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경기도 안산의 사례이다. 장애인 형제를 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형제를 돌볼 사람이 없게 되었다. 기존의 익숙한 방식으로는 아마도 시설로 보내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산의 공동체는 다른 상상력을 발휘한다. 지역에서 공동체가 함께 돌보기로 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게 된다. 지역 공동체의 활성화와 자발적인 시민들의 참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놀라운 성취이자 해방이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접촉면이 넓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좋은 사례이다.

연극 '등장인물'은 등장보다 퇴장이 더 빛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대에서의 퇴장은 삶의 세계로의 등장이다. 이 퇴장은 자립생활의 장소로 등장하는 퇴장이다. 무대에서의 퇴장이 삶터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거룩한 퇴장이다. 출연자들이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동안 화면에는 그들이 시설에서 나와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흘러나온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그 일상의 장면 하나하나가 사실은 가장 소중한 삶의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밥을 먹거나 운동을 하는 모습이 평범해 보이지만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어 화면에는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출연자들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나온다. 그들이 삶의 세계로 등장하고 있다. 출연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극장에 남은 관객이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고 있다. 매우 독특한 커튼콜이다. 지금까지 시설에 분리된 채 우리 사회에 미처 등장하지 못했던 그들이 이제 당당히 세상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아직 등장하지 않은 등장인물이 아니다. 연극 '등장인물'은 우리가 얼마나 비장애인 중심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하며, 동시에 장애인 스스로가 해방을 향한 자립생활의 실천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