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항은 강대국의 문호개방 요구로 체결한 불평등 조약에서 시작했다. 중국은 영국과 1, 2차 아편전쟁을 치르고 난징조약(1842), 톈진조약(1858)과 같은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고 개항했으며 일본은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제독의 요구에 굴복하여 미일화친조약(1954)을 체결하고 개항하였다. 인천개항은 일본이 일본 군함 운요호와 조선군 사이에 벌어진 포격전의 책임 배상을 요구하며 이뤄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1876)'에 근거하여 1883년 1월1일에 이뤄졌다.
강대국, 문호개방 요구 불평등 조약 시작점
日이 일으킨 전쟁터·군수지원 등 역할 강요
개항 이후 세 나라의 운명은 갈라졌다. 중국은 서구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했지만, 일본은 근대국가체제를 신속히 정비하여 이웃 나라를 식민지화하는 제국으로 탈바꿈했다. 조선은 개항 이후 '구라파의 일원'을 자처한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졌다.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이 일으킨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37년 중일전쟁, 1941 태평양전쟁에 휘말려 들어가 전쟁터가 되거나 각종 군수 지원이나 징병 등으로 전쟁을 지원하는 역할을 강요당했다.
40년 전 인천개항 100주년 행사도 돌아보자. 당시 인천시는 각종 공연과 개항 가장행렬, 100주년 기념 사료 편찬, 100주년 기념 사진자료집을 발간했으며 11억원을 들여 연안부두 입구 교차로에 개항100주년기념탑도 세웠다. 그런데 개항100주년기념탑은 상징성과 역사성 논란에 휩싸였고 안전성 문제까지 제기되면서 2003년에 철거되고 말았다. 인천개항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찰하지 않은 탓으로 22억원의 혈세와 사회적 비용을 '탕진'하고 만 것이다.
수탈·착취속 자본주의 발전 이룬것도 사실
동양3국·서양 공존 '문화 접변지대'로 가치
개항장의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시 세워야 한다. 식민지배는 제국의 정치 경제적 이해를 위한 억압과 수탈, 착취가 필연적으로 이뤄지지만, 식민지를 지속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최소의 물적 기반인 자본주의적 발전도 '일정하게' 이뤄진 것도 사실이다. 이 양면성을 동시에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각종 폭력적 지배구조와 자본주의 근대를 동시에 비판하는 성찰을 통해 기존의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은 극복할 수 있다.
인천 개항장의 문화유산도 식민지적 성격과 근대성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개항장 문화유산이 지니는 이중성을 감안하지 않고 개항을 특화하게 되면 개항장은 싸구려 세트장처럼 꾸며지거나 식민지를 미화하는 공간으로 전락하여, 관광 활성화는 고사하고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곳이 될 공산이 크다. 물론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졌다 해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직접 관계되지 않은 유산이나 유물까지 수탈의 잔재로 치부하는 것은 일면적이며 패배주의적 역사의식의 소산이다. 이런 논리라면 식민지 근대를 경과하면서 형성된 일체의 문화, 그 시대를 겪으며 형성된 주체인 우리의 정신까지 모두 부정하게 된다.
그런데 개항 전후 조선정부의 능동적인 대응도 주목해야 한다. 정부는 묄렌도르프를 초청하여 해관설치 준비를 하였으며, 개항장을 관리하기 위한 특별 행정기관인 '인천항감리서'를 설치하여 각종 업무를 수행케 했다. 그점에서 감리서터는 중요한 유적이다. 한편 일본인과 중국인을 비롯한 서양인들이 조계지(租界地)와 공동거주 지역인 '잡거지'로 구성된 인천 개항장은 동양 3국과 서양의 문화가 공존했던 근대 문화의 접변지대로서의 가치가 있다. 인천개항 140주년 개항의 의미를 차분히 되돌아보고 그 역사적 교훈을 시민들과 공유하면서 문화유산정책을 비롯한 각종 도시정책을 가다듬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