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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 시인
미암 유희춘(1513~1577)은 해남에서 태어났다. 가계는 증조할아버지가 유양수고 할아버지는 유공담이며 아버지는 유계린이다. 김안국과 최산두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38년(중종 3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사가독서로 집에서 학문에 전념한 다음에는 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수찬이라는 벼슬은 조선시대 홍문관에 두었던 정육품 관직이며 정언이라는 벼슬은 국정에 관한 간쟁과 왕의 정치에 대한 비평, 관원을 탄핵하는 등의 언론을 담당했던 사간원의 관원이다.

을사사화 때 김광준과 임백령이 윤임 일파를 제거하자고 요구했으나 동의하지 않았다. 사화에는 외척이 깊이 개입했다. 명종 즉위(1545년) 직후 시작된 을사사화는 2년 뒤 정미사화까지 지속된 장기적인 정치 투쟁이었다. 유희춘은 1547년 양재역의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양재역의 벽서사건이란 1547년(명종 2) 9월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임금에게 바치며 발생한 사건으로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 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으로 정미사화라고도 불린다.

유희춘은 해남에서 제주도가 가깝다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위리안치 되었다. 위리안치란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두는 형벌이다. 유희춘은 1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국경 지방에는 학문을 하는 선비들이 없었다. 유희춘은 변방의 젊은 인재들을 위해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가 유배를 와서 글을 가르친 뒤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문을 하게 되었다.

19년 유배후 선조때 복직 '미암'
아내에 '여자 멀리했노라' 편지

'당신의 어머니 지성으로 장례'
송덕봉 질책에 할 말이 없었다


유희춘은 선조가 즉위하자 19년 만에 해배되어 다시 벼슬을 시작했다. 선조는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유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라고 유희춘을 칭찬했다. 그 후 유희춘은 외조부인 최부의 학통을 이어 이항, 김인후 등과 함께 호남 지방의 학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유희춘은 '나는 항상 6가지 절목을 세워 책을 읽는다. 첫째 부지런히 책을 읽을 것, 둘째 읽은 내용을 반드시 기억할 것, 셋째 읽은 뒤에 정밀하게 생각할 것, 넷째 분별을 분명하게 할 것, 다섯째 읽은 것을 잘 기술할 것, 여섯째 읽은 것을 충실하게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라고 했다.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한문으로 쓴 친필 일기다. 1567년(선조 즉위년) 11월 5일 이른 새벽, 멀리서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파루의 종소리가 울리자 이미 잠에서 깬 미암은 이불 속에서 그 종소리를 헤아리고 있었다. 오늘은 그가 오랜 유배에서 풀려나 복직하는 첫 날이다. '남쪽바다 북쪽 바다 쓸쓸한 땅에/23년 동안 버려뒀던 몸/옛 친구 생각하며 쓸쓸히 문적부(聞笛賦)만 읊고/고향 오니 어느덧 도끼자루 썩은 사람과 같다/가라앉은 배 옆에 온갖 배들 가는 것을 보지만/병든 가지에 그래도 한 점 봄이 있다/오늘밤은 장락궁 곁에서 종소리를 들으니/술 마시지 않아도 정신이 상쾌하다'라고 해배의 기쁨을 노래했다.

미암은 아내 송덕봉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눈이 내리니 바람이 더욱 차가워/그대가 추운 방에 앉았을 것을 생각하노라/이 술이 비록 하품이지만/차가운 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으리'. 이 시를 받은 송덕봉은 '국화잎에 비록 눈발이 날리지만/은대(승문원)에는 따뜻한 방이 있으리/차가운 방에서 따뜻한 술을 받으니/속을 채울 수 있어 매우 고맙지요'라고 화답한다.

유희춘은 편지에서 한양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노라고 썼다. 송덕봉은 '예순의 나이에 혼자 잤다면 스스로 기운을 위해 이로운 것이지, 제게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닙니다'라고 질책한다. 그러면서 '저는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당신은 함경도 종성에 귀양 가 있고 돌봐주는 사람 없었지만 예법에 따라 지성으로 장례를 치렀지요'. 미암은 할 말이 없었다.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