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12월 22일 월요일, 인천 제물포항에서 승객 121명을 태운 배가 출발했다. 일본 화물선 현해환(玄海丸) 호는 이틀 뒤 일본 나가사키 항에 도착했다. 승객들은 다시 '갤릭(Gaelic) 호'로 갈아타고 이듬해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입항했다. 120년 전, 차마 떠날 수 없어 눈물로 바다가 된 미국 하와이 이민사의 시작점이다.
남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초기 이민자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하루 10시간 넘게 일했다. 외교적 문제로 인력 공급이 중단된 중국인과 일본인 노동력을 빠르게 대체했다. 당시 정부는 하와이 이민을 장려했고, 혹독한 굶주림과 불안한 정세를 벗어나려는 이들의 도피처가 됐다. 1903~1905년 사이 64회 출항에, 7천415명이 새 삶을 꿈꾸며 배에 올랐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엔 이승만 서재필 등 독립운동가들이 한인사회에 합류했다.
하와이에 정착한 교민들은 한시도 조국 땅을 잊지 않았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주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인천에 공과대학을 만들자고 제안하자 나라 재건에 보탬이 되겠다며 적극 호응했다. 1954년 개교한 인하대학교는 인재 양성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자며 이역만리에서 교민들이 피땀으로 젖은 종잣돈을 모아 보내온 성금으로 지어졌다. 교명인 '인하'는 인천의 '인(仁)'과 하와이의 '하(荷)'를 조합해 탄생한 것이다.
유정복 인천시장이 지난 20일 하와이에서 교민들을 만났다. 이민 120주년 기념 '인천의 날' 행사장에서다. 유 시장은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기까지 750만 재외동포의 노력이 있었고, 그 가운데 인천이 있었다"며 방문의 의미를 강조했다. 교민과 방문단은 인천 출신 그룹사운드 '사랑과 평화'가 히트곡 '한동안 뜸했었지'를 부르자 함께 박수 치고 소리치며 하나가 됐다.
행사장에 온 교민들은 하와이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여론 주도층이다. 하와이 한인회, 하와이 한인체육회,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 한인상공회의소 등 12개 한인 단체는 '재외동포청'을 인천에 유치해야 한다고 지지 선언을 했다. 하와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는 최초 이민자 121명 가운데 상당수를 점하는 인천 '내리교회' 교인들이 설립했다. "니가 가라"는 하와이, 인천 방문단이 때맞춰 잘 갔다.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