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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한밤이다. 병실의 아버지 옆에 누워 옛날 영화를 찾는다. 기억에, 아역배우 김정훈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수술실인지에서 나왔다. 머리에 하얀 붕대를 쓰고 목 아래는 무슨 흰 상자 같은 것에 싸여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었던가, '정훈이'는 부모와 떨어져 껌팔이도 하고 있었다.

세상이 좋다. 뭐든 검색을 하면 나온다. 몇 번 찾다가 못 찾은 것을 이번에는 신기하게도 금방 찾았다. 1970년에 상영한 '미워도 다시 한 번 3'이다. 관객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두 번, 세 번, 네 번을 거듭해서 제작했다. 지금 아버지 계신 병원의 의사가 되어 있는 첫째 동생이 이 영화를 보면서 엉엉 울었다. 일곱 살 적에 살던 공주, 스크린에 비가 내리는 공주극장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까지 함께 본 영화였다.

김정훈의 극중 이름은 영신이었다. 극중 신호로 분한 신영균은 시골에 아내가 있으면서 서울에서 사업하다 혜영(문희)과의 사이에 영신을 낳게 된다. 혜영은 영신을 신호 부부에게 맡기지만 우여곡절 끝에 영신을 데리고 바닷가로 내려가 혼자 키운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미워도 다시 한 번'이다.

세 번째 시리즈에 오면 혜영은 재일교포와 결혼해 일본으로 떠난다. 영신은 신호의 부부에게 맡겨진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영신은 집을 뛰쳐나가 헤매다 범죄를 일삼는 조직에 잡혀가고 만다. 어렸을 적 내 뇌리에 깊이 박힌 장면은 그러던 영신이 교통사고를 당한 대목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가슴이 아프다. 나는 현재에 살고 있지만, 옛날 사람처럼 옛날에 살고 있다. 


삶 마지막 고비 넘고 계신 위태로움
나는 요즘 정치 신경 쓸 여유없지만


아버지는 병원에 다시 입원해서 두 달 넘으셨다. 작년에 대장암 수술을 받으시고 누워서만 지내시다 요관암으로 시술까지 받으셨다. 한국 나이로 아흔 살, 삶의 마지막 고비를 넘고 계신다. 십수 년 전에 발견된 위암과 신장암에 이어 네 개째의 암이요,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이다.

코로나 이후에 병원에서는 환자 옆에 오로지 한 사람만 있을 수 있게 한다. 가족인 보호자든 간병인이든 한 사람만 허용된다. 때문에 환자의 가족은 선택을 해야 한다. 가족 구성원 중 누가 직접 돌보든가, 간병인에게 맡기고 사태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든가 해야 한다.

서양에서는 일체 병원에 맡기고 가족들은 물러나 있는다고, 한국도 그래야 한다고들 한다. 환자의 안정과 치료를 위해서는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다. 장례식장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 한국적 정서에는 맞지 않는 방식이다. 가족을 대신해 줄 간병인도 생각만큼 환자 관리에 철저하지는 않다.

집에 돌아오고 싶어 하는 아버지 마음을 차마 저버릴 수 없었지만, 잠깐 사이에 상태가 악화되고 말았다. 다시 병원이고, 간병인도 '쓰다가', 이제 다시 팔순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돌보신다. 이번에 모처럼 내가 어머니를 교대해서 밤을 지키기로 했다.

인생을 생각한다… 누구나 실 잣듯
정든 사람 짓고 풀지 않으면 안된다
제도·파당 대신 인생 순리 생각할 때


그러고 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다. 병실의 밤은 일찍 불들을 끄고 숨을 죽인다. 바로 옆 침대의 노인만 몹시 아플 때마다 쌍소리를 내지른다. 어지간히도 세상을 험하게 살아오신 모양이다. 아파서 그러시니 참아드려야 한다.

사랑하는 이들, 가족을 가진 모든 이들이 저마다 정든 사람 곁에 있고자 하는 밤이다. 나는 아버지 옆에 있지만 내 정든 이들은 아버지만 빼놓고 모두 곳곳에 흩뿌려놓다시피 했다.

이제 곧 세밑이라는 생각이 든다. 양력 세밑이지만 올해는 유난히 을씨년스럽고 쓸쓸하기만 하다. 잠들어 계신 아버지 손을 잡아본다. 며칠 전만 해도 손이 뚱뚱 부어 계셨는데, 지금은 팔과 발로 부종이 옮겨가셨다. 이미 온몸의 통증이 깊어 마약성 패치로나 버티실 수 있다.

요즈음의 나는 수시로 변하는 정치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돈도 다 동나 버렸지만, 그것도 아무렇지 않다. 다만,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한 번 세상에 온 누구나 실을 잣듯 정든 사람을 짓고 또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제도나 파당 대신에 인생의 순리를 생각해야 할 때다.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다스릴지 생각해야 할 때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