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네는 정환이네 집 반지하층 세입자다. 정환이네도 동룡이네 단칸방에 세들어 살던 처지였다. 장남인 정봉이가 취미로 수집하던 올림픽 복권이 1등에 당첨된 덕분에 2층 양옥집과 전파사를 마련했다. 두 가족은 잠만 따로 잘 뿐 일상을 공유하는 한 가족처럼 지낸다. 형편은 다르지만 음식을 나누고 인정을 나누고 애들은 함께 큰다.
'1988'까지는 오랜 세월 덕선이네와 정환이네처럼 가족같이 지낸 집 주인과 세입자들이 많았다. 방 한 칸 내어주고 얻어서 같이 살다 쌓은 정이 그만큼 깊었다. 동네가 재개발되자 덕선이네는 정환이네를 따라 판교 이주를 결심한다. 인정(人情)이 주거복지였던 시대라 가능했던 에피소드이다.
이젠 덕선이네와 정환이네를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이다. 주거 환경이 집주인과 세입자가 얼굴을 대면하고 사는 구조가 아니다. 집주인과 세입자의 인연은 임대차계약서 한 장이 고작이다. 갑을 관계만 남으니 서로 손톱 만큼의 손해에도 양보가 없다. 자연히 갑의 위세에 을의 설움이 깊어진다. 그래도 세입자들은 집 주인들의 갑질이 임대차계약서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믿었다.
전세계약서를 신줏단지로 여겼던 세입자의 믿음이 산산조각 났다. 수도권에 빌라와 오피스텔 1천139개를 소유한 40대 김모씨가 최근 숨졌다. 세입자 수백 명이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길이 막혔다. 한 사람이 1천 채가 넘는 주택을 소유할 수 있는 현실이 코미디 같은데, 세입자들의 현실은 악몽이다. 은행 등 채권자들이 경매에 나서면서 엄동설한에 한 푼 없이 쫓겨 날 형편이다.
김씨에 이어 인천 미추홀구 등에 역시 빌라·오피스텔 수십 채를 보유한 20대 송모씨도 사망했다. 지난해 7월엔 주택 240여 채를 세 놓은 40대 정모씨도 사망한 사실이 드러났다. 세입자들은 이들을 '바지 사장'으로 의심한다. 실제 사기 설계자들은 모든 책임을 망자에게 떠넘기고 돈을 챙겼다는 것이다. 일은 대통령이 직접 대책을 지시할 정도로 커졌는데, 계약서만 놓고 보면 피해 복구는 요원하다.
빌라왕들의 잇단 사망에서 악마의 미소가 감지된다. 계약사회의 틈새에 똬리를 튼 악당들을 색출해 영구 격리해야 한다. 감히 등쳐 먹을 돈이 아니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