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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소설가
작년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학생들과 '올해 읽은 책 중 최고의 책'이 무엇이었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겹치는 책은 한 권도 없었고, 처음 듣는 작가도 있어서 메모해두기도 했다. 누군가 "윌리엄 트레버를 이제 다 읽었어요"라고 말했고 '탁자'라는 단편을 읽고 일주일 동안 멍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이 아일랜드 작가에 대한 오래된 사랑이 떠올랐다.

내가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집을 사서 하루에 딱 한 편씩만 아껴서 읽던 순간은, 내 삶이 트레버의 소설처럼 변하는 시간이었다. 특별한 의지를 갖고 선택한 것도 아닌데 인생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늦게 결혼하여 어린 아기가 태어났고, 결국은 책으로 출간하기를 포기하게 될 장편소설을 시작한 참이었다. 냉정히 판단해보면 그 시절은 조금씩 난파하여 가라앉는 초창기에 속했다. 그때 이 작가를 알게 됐고, 책 속에는 나보다 가진 것이 없거나 선택지가 적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는 한 무더기의 '가장자리 인간들'에게 연민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다.

연민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연민은 동정처럼 마음이 비탈진 언덕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연민은 같은 고도에서 눈을 맞추며 '나, 이 감정을 알아'라는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정확히는 '당신의 불운을 나도 알 것 같아'라고 속으로만 말하는 것이다. 작지만 기적같은 순간인데 인간은 자신의 인생과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감옥에서 너라는 세상으로 열리는 창문을 만드는 것. 그러므로 연민은 기적이 맞다.

인생 단면 맑은 물속 비춰보듯 표현
쓸쓸하고 슬픈 그의 소설 읽고나면
나를 위한 작은 자리 마련된것 같아


그 속에서는 이해가 이루어진다. 불운이 얼마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행운도 불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고립 속에 인생이 낭비되어 버리는지, 이 완강한 세상을 거스를 수 없는 무력감을 지닌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발버둥을 치는지. 트레버는 이런 인생의 단면을 맑은 물속 들여다보듯 그려낸다. 한편으로 그 풍경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과 품위, 빗나간 꿈이 빚어내는 회한의 빛깔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나는 '로맨스 무도장'의 브리디와 같은 인물을 상상하는 트레버를 상상한다. 서른여섯의 노처녀, 아일랜드 시골 마을의 작은 읍내 생활에도 끼지 못하고 18㎞나 떨어진 외딴 농가에서 다리 한쪽이 없는 아버지를 돌보며 고립되어 살아가는 브리디의 내면을 트레버는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인생의 큰 무대에 한 번도 나가 선 적이 없고, 남들이 다 가지는 통속의 삶속에서도 변변치 않은 브리디는 '승리를 모르는 나의 영웅들' 가운데 하나다. 내 마음 속에서 브리디에 견줄 만큼 애틋한 책 속의 존재는 흔치 않다.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들은 쓸쓸하고 슬프다. 그러나 다 읽고 나면 이 세상 어딘가에 나를 위한 작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 낙관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확장된 문학의 꿈이다. 도서관에 가서 800번 대의 소설들을 펼쳐보라. 거기에는 외톨이와 괴짜, 미치광이와 속물, 터무니없는 꿈을 꾸고 실패한 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몽상가, 아무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독자가 책을 읽어나갈 때면 꿈속의 일들이 그렇듯이 저절로 주어지는 믿음이 있다. 책 속 세계에는 그들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소설이 어떤 인물과 사건을 다루든, 책의 진정한 메시지는 이것이다. 이야기 속에는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다는 것. 그들 모두가 앉아있는 공간을 상상하면, 그건 지구보다도 크다. 전 세계의 전 인류들, 지나간 세기의 사람들, 사람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건축, 사물에 이르기까지. 요컨대 세상 전부. 그들을 위한 자리가 이야기 속에 있다. 그래서 책 속의 세상은 펼쳐놓으면 지구보다 훨씬 커서, 어쩌면 태양계를 가득 메울지도 모른다.

새해 희망 부풀고 꺼지는 순간 예감
도서관 800번대 책들속에 한권 더 해


새해가 시작되면 우리는 부풀어 오르는 희망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다. '다시 시작하게?' 마음 속의 목소리가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시에 이 희망이 꺼지는 순간도 예감한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를 위한 자리는 우주에 있고, 그것을 받아적을 작가 또한 어디선가 서성거리고 있다. 800번 대의 무수한 책들에 한 권 더 늘리는, 눈에 띄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