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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들의 나라 미국은 건국 신화가 없다. 원주민인 인디언의 신화는 있지만 다인종 다문화 이주민이 수용할 리 없다. 대신 미국을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로 독립시킨 13개 주 대표 147명을 '건국의 아버지들'로 기린다.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등 독립전쟁에 참여하고 헌법 제정에 참여한 인물들이다. 미국인들은 건국의 아버지들을 반신(半神)의 반열에 올려놓고 추앙하며, 국가적 위기 때마다 소환해 미합중국의 초심을 되새긴다.

우리 현대사에도 국민의 뇌리에 박제돼 늘 현실로 소환되는 정치인들이 있다. 박정희, 김대중이 으뜸이다. 정치적 적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한 시대의 두 상징으로 현대사를 완성한 역사적 커플이자 콤비였다. 박정희는 오천년 빈곤을 타파한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이다. 김대중은 인동초의 세월을 인내하며 민주주의의 마침표를 찍은 민주화의 표상이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진영과 지역의 시선의 차이는 여전하다. 박정희는 보수의 연인이고 김대중은 진보의 애인이다. 그래도 산업화와 민주화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두 영웅의 역사적 업적은 진영을 초월한다. 달구벌 대구와 빛고을 광주는 2013년 '달빛동맹'을 맺고 두 상징의 화해를 선언했다. 두 도시를 잇는 내륙철도 건설에 힘을 모은다. 역사는 이렇게 긴 호흡으로 시대를 통합한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지난 7일 민주당 광주시당에서 '만약 지금 DJ라면?'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초청강연에서 "지금 DJ(김대중)가 있었다면 '이재명을 중심으로 뭉쳐서 싸워라'고 했을 이야기가 저는 들리는데 여러분 귀에는 안 들리냐"고 말했다. 이에 앞서 5일 출연한 한 유튜브에선 "이재명이 김대중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다른 방송에선 '김대중의 고초와 이재명의 고초를 동급'으로 설명했다.

반응이 싸늘하다. 광주 시민들은 '김대중 격하'이자 'DJ 모독'이라고 격분한다. 이재명만을 위한 박지원의 DJ 소환은 패착이다. 목숨 걸고 민주화를 완성한 김대중의 고난과 다양한 개인 비리 및 범죄 의혹으로 궁지에 몰린 이재명의 고초가 동급이라니, 광주에선 만용에 가깝다. 김대중은 광주의 성역이고, 광주는 진보의 성역이다. 박지원이 너무 큰 인물을 소환했다. 이재명만 상처를 입었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