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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초하루, 동도 트기 전인데 누군가 '복조리요'하고 어둠을 가른다. 뜀박질이 점차 멀어지고, 집 마당엔 그가 떨군 복조리 묶음이 엎어져 있다. 1970년대, 시골 마을의 설날 아침은 복조리를 돌리는 청년의 외침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복조리를 던지고 떠난 청년은 같은 마을 이웃이다. 그냥 갔다고 공짜는 아니다. 다음날 혹은 수일이 지나 수금하러 오는데, 정가(定價)는 따로 없다. 물리거나 흥정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집마다 형편에 따라 일정 금액을 손에 쥐어준다. 청년도, 주민도 서로가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아는 사이 아닌가. 이렇게 모인 돈은 마을 청년회나 부녀회 공동기금으로 쓰인다. 복을 받고, 답례하는 미풍양속이다.

조리(조籬)는 쌀을 이는 기구다. 뜨물을 이리저리 휘저어 돌과 이물질을 걸러낸다. 대나무를 가늘게 쪼갠 죽사(竹絲)로 엮어 만드는데, 아무나 만들 수 없는 수공품이다. 정초에 새로 장만하는 것을 특별히 복조리라 하였다.

'그 해의 행복을 쌀알과 같이 조리로 일어 취한다는 믿음에서 생겨난 풍습으로 보인다. 설날에 조리를 1년 동안 사용할 수량만큼 사서 방 한쪽 구석이나 대청 귀퉁이에 걸어놓고 사용하면 그 해에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민간신앙도 있다. 조리 속에 돈과 엿을 넣어두면 더 좋다고 한다'.(두산백과 참조)

설 명절을 앞두고 안성 구메농사마을 주민들이 복조리를 만드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연세 지긋한 아낙 셋이 조리를 엮고 있는데, 작업에 몰두한 표정이 덤덤하다. 수북하게 쌓인 조리 더미를 만드느라 지친 듯한 얼굴이다. 몸은 고되나 며칠 지나면 동네 집마다 정성 가득한 복이 전해질 터이다.

민족 최대 명절인 설날엔 차례를 지낸다. 설빔으로 단장하고 웃어른을 찾아 세배를 드린다. 만두를 빚고 떡국을 함께 먹으며 이웃과 정을 나눈다. 설에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다양한 풍습들이 있는데, 맥이 끊기면서 점차 잊히고 있다. 윷놀이, 널뛰기는 봤으나 문안비, 설그림, 야광귀 쫓기, 청참은 다 뭔가.

온라인 쇼핑몰에 복조리 판매대가 즐비하다. 복주머니, 소코뚜레 등을 묶은 패키지 상품이 다양하다. 오늘 구매하면 내일 새벽 문 앞에 온다. 조리 엮는 아낙도, '동네 한 바퀴' 청년도 사라졌는데 아쉽지도 않은 세상이다.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