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해리 왕자의 회고록 '스페어(Spare)'가 지난 11일 발매 하루 만에 140만권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고 한다. 스페어는 왕가와 귀족 집안의 차남을 뜻한다. 고명딸은 '고명'일 뿐이라는 드라마 대사와 비슷한 맥락의 은유이다. '스페어'는 출간 전부터 해리가 형인 윌리엄 왕세자에게 폭행당했다거나, 아버지 찰스 국왕의 재혼을 반대했다는 등의 일부 에피소드가 언론을 타면서 세인의 관심이 집중됐다. 왕실의 민낯을 예고한 노이즈 마케팅이 베스트셀러의 원동력이 됐다.
유명인들이 세속적 회고록으로 떼돈을 버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역사의 현장에서 주역이었던 인물들의 회고록은 그 자체가 역사적 사료가 된다. 사건의 배경과 이면을 밝힌 회고록으로 역사적 장면은 명징해지고, 때로는 새롭게 정의된다. 북한은 지금도 6·25전쟁을 북침이라 우기지만, 구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 김일성을 전쟁의 장본인으로 증언했다. 덕분에 북한의 억지는 역사에서 추방됐다.
최근 역사적인 미·북, 남·북·미 정상회담을 현장에서 지휘한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 국무장관의 회고록이 화제다. 특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비화는 충격적이다. 폼페이오가 "중국 공산당은 미군이 한국을 떠나면 김 위원장이 매우 기뻐할 것이라고 한다"고 전하자, 김 위원장은 손으로 탁자를 치면서 "중국인들은 거짓말쟁이"라고 외쳤단다. 김 위원장은 오히려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주한미군이 필요하다"며 "중국은 한반도를 티베트와 신장처럼 다룰 수 있도록 미군 철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등장한다. 2019년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때 문 전 대통령이 몇 번이나 전화해 회동에 참여하겠다고 요구했고, 김 위원장은 미·북 정상만 만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폼페이오는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에게 내줄 시간도 존경심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 국무위원장이 중국을 실리적이고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문 전 대통령이 미·북 정상회담장 밖에서 대기했던 어색한 상황과 하노이 노딜 이후 북한이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발작의 배경도 선명해졌다. 이 같은 사실을 폼페이오 회고록으로 알아야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