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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지난 학기에도 학생들과 함께 시를 읽었다. 내가 담당한 과목은 시 창작이나 글쓰기가 아니지만 한 학기 동안 모든 학생이 각자 시 한 수를 마음에 들여놓는다는 목표를 세워놓았다. 그래서 매 학기 한 주는 시를 읽고 낭송하는 데 할애한다. 비록 2년 반 동안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시 낭송 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지난 학기에 대면 강의를 시작하면서 다시 시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학생들은 마음에 드는 시를 한 편씩 손글씨로 써왔다. 정성껏,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쓴 시를 친구들과 함께 읽는다. 시를 한 편씩 읽을 때마다 잠깐씩 시간이 멈춰 선다.

첫 번째 시 낭송 시간이었다.

한 학생이 낭송하는데 중간중간 숨을 몰아쉬며 떨었다. 듣고 있던 다른 학생도, 보고 있던 나도, 같이 떨었다. 오랜만에 보는 장면이었다. 민영규 선생은 말했지. 지남철이 떠는 이유는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서라고 떨지 않는 지남철은 버려야 한다고. 손이 떨린다. 목소리가 떨린다. 그렇지. 떨림은 진실의 몸짓이니까.

이렇게 그 시간의 떨림은 모두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이렇게 잡아두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덧없이 지워져 버리고 말 것이다.

두 번째 시 낭송 시간이었다.

한 학생이 고은 선생의 시를 골랐다. 왜 그 시를 골랐는지 물었더니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짧아서 골랐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나는 버럭 호통을 치고 말았다. "짧아서 골랐다고? 자네가 시를 고르는 기준이 고작 분량인가? 상품 고를 때조차도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 자네가 시를 고르는 정성이 상품 고르는 정성에 미치지 못하다니, 이건 자네가 고른 시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하지만 학생의 표정은 진지했다. "교수님, 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말씀드린 겁니다." "아, 그래? 그렇다면 내가 오해했을 수도 있겠구나. 아무렴 비난도 진심이라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한번 말해보거라." "예, 저는 시를 고르기 전에 다른 시를 많이 읽어보았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이 시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골랐습니다."

"젊은시절 소중한 것 보지 못하면
늙어서도 보지못해… 아직 젊지만
주변 소중한 것 놓치지 않는 삶을"


학생의 진심을 알아차린 나는 내가 오해해서 성급하게 화를 내었으니 미안하다 사과했다. 이어 시를 낭송하고 어떤 감흥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그 꽃'.

낭송을 마친 학생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저는, 정상만 보며 산을 오를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꽃을 내려올 때 비로소 보게 되는 것은, 마치 젊은 시절 성공을 향한 야망을 불태울 때는 미처 보지 못한 소중한 것들을, 나이가 들고 많은 것들을 내려놓은 뒤에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듣고 있던 나는 학생에게 시를 잘 이해했다며 칭찬했다. 그런데 이어진 학생의 이야기가 나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저는 이 시를 여러 차례 읽은 뒤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 젊은 시절에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하면 늙어서도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젊지만,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강렬한 인상준 詩 고른 제자에 감탄
헛되이 쓴 사람에겐 귀중함 안보여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성급하게 화를 낸 나야말로 꽃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이 아닌가. 학생의 말은 참으로 옳다. 30년간 책을 읽어야 다음 30년간 읽을 책이 있게 되고 30년간 음악을 들어야 다음 30년간 들을 음악이 있게 되는 것처럼 젊어서부터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않아야 늙어서도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알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성공한 다음에 하고 싶은 것들을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성공을 기약하며 소중한 것들을 허비해버린 사람에게 소중한 것들이 눈에 보일 리 없다. 나는 학생에게, 늙은 시인이 쓴 시를 젊게 읽어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불어 하마터면 곧 태어날 위대한 시인을 죽일 뻔한 나의 잘못을 반성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