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복-전_인천시_정무부시장.jpg
'서양 떡'이라 불리던 빵이 선교사들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140년이 되었다니, 등잔불 켜고 살던 작은 어촌 제물포가 조선 말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격동기 틈새에서 개항된 시기와 거의 비슷하다. 상하이, 요코하마, 홍콩, 싱가포르까지 아시아 도시들이 외세에 의해 개항되었듯이 제물포도 일본 군함 운요호 사건이 빌미가 된 '조일 수호 조규'(일명 강화도조약)에 의해 1883년 불평등하게 개항됐다. 개항 대상지 세 곳을 지정한 것도 일본이다. 인천의 개항이 애초 약속보다 늦어졌다는 점에서 조선의 반발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천은 이미 거류지 무역이 시작된 부산과 군사 목적의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됐지만, 우리나라 근대화를 주도한 것은 제물포(인천)였다.

당시 제물포는 상인들의 친목 모임 '인천 객주회'(인천상공회의소 효시) 정도가 청국·일본 상인들과 거래하고 있었을 뿐 항만시설이 거의 없었다. 근대식 항만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서다. 백범 김구가 축항 노역을 했다는 제1선거(船渠)가 모습을 드러낸 것도 1918년 일이다. 인천항 갑문(閘門)은 가히 우리나라 항만사(史)의 혁명과도 같았으며, 경인철도 활성화와 우체국·호텔 등 근대 문물이 인천에 가장 먼저 들어서게 한 동력이 됐다.

당시 세워진 팔미도 등대의 빛도 올해로 120년이다. 갑문식 도크(dock)화 덕분에 가능했던 제2선거(현 2·3·4부두)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공사가 중단되고 인천상륙작전 포격으로 일부 손상되기도 했다. 지금 운영되는 갑문은 1974년에 완공한 것이고 5·6·7·8부두까지 갖춘 내항의 완전체는 2004년에 완성됐다. 인천항은 바로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관통한 역사의 현장 그 자체다.

경인항~북항~내항~연안항~남항~신항으로 이어지는 부두 길이만 29㎞인 인천항은 컨테이너 물동량 기준으로 국내 2위, 세계 50위권 항만이다. 신항 컨테이너 물동량의 꾸준한 성장과 남항을 중심으로 한 고부가가치 이커머스(e-commerce), 콜드체인 클러스터 조성 등으로 인천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는 국내 1위는 물론 동아시아 최고 항만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갖고 있다. 당연히 인천항이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인천시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이다. 


운요호 사건 빌미로 1883년 불평등 개항
부산·원산 이어 3번째 문호 '근대화' 주도
컨 물동량, 국내 2위·세계 50위권으로 도약
고부가 이커머스 등 동아시아 최고 가능성


하지만 인천시민들에게 제물포 개항은 아직도 머나먼 이야기다.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면서 굳건한 항만 국유제를 유지하고 있는 정부의 항만정책 속에서 인천항은 동아시아에서나마 국제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중국에 편중된 물동량, 항만자치권이 없어 바다를 쳐다만 보고 있어야 하는 인천시, 무늬만 해양도시라는 시민들의 자조 섞인 불만 등 해소해야 할 숙제가 하나둘이 아니다. 필자는 정부 탓 이전에 지역을 사랑하는 진심으로 인천을 향해 거친 조언이라도 서슴지 않기로 했다.

첫째, 인천항은 부두 임대사업자의 것이다.

내항 8부두 한쪽에 있는 1·8부두 재개발 홍보관에 가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인천항만공사가 운영 중이다. 시중 민간 아파트를 분양할 때도 인천 홍보를 하던데, 인천시가 운영한다면 저럴까 싶다. 요즘 오는 사람도 별로 없고 가끔 집주름들이 다녀간다고 한다. 그 건너편에 유리창이 깨진 채로 방치된 상상플랫폼 건물을 보면 상상과는 먼 무슨 관공서 건물을 또 하나 짓다가 만 것 같다. 지역총생산 3분의 1을 차지하는 항만에서 재개발사업을 벌인다는데, 인천시가 막상 홍보관 하나 운영할 일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인천항만공사처럼 인천에 있으면서 인천이 아닌 공기업들을 필자는 '인천의 급소'라고 부른다. 소중하지만 늘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급소들은 항만뿐 아니라 공항, 쓰레기매립지, 산업단지 등 인천 전역에 포진해 있다. 항만의 공공성을 유지하면서 경직된 정부 조직을 벗어나 지방정부와 함께 기업의 효율성을 도모하자는 취지로 설립된 항만공사는 해양수산부의 부두 임대사업자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과 호흡하며 항만 개발을 기획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글로벌 항만들은 고사하고 싱가포르, 상하이 등 아시아 항만들의 추세에도 역행하는 부두 임대사업자와 항만자치권이 제로인 인천시가 딱히 함께할 일이 있겠는가.

둘째,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민선 8기 인천시 중점 사업인 '제물포 르네상스' 조성은 일의 순서가 꼬여 있다. 일단 돌파구를 만들어야 길이 생긴다는 전략인지는 모르겠으나 항만자치권 확보가 인천시 정책 최우선 순위에 들어가야 한다. 시장 공약에는 들어있다고 하던데 그나마도 시민제안공약을 수용한 것이어서 얼마나 추진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인천시 항만 관련 부서는 업무 공간이 부족한 시청사에서 딴 집 셋방살이 단골이라는 보도들을 접하다 보면 인천이 해양도시가 맞나 라는 느낌마저 든다.

내항을 재개발하든 제물포 르네상스를 조성하든 그 전제는 항만자치이고 항만자치의 시작은 인천항만공사의 지방화다. 항만법·항만공사법 개정을 시민들과 함께 밀어붙이는 '인천항 자치를 위한 여야민정협의체'라도 만들어야 한다. 혹자는 부산, 울산, 여수광양항도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곳들은 수도권이 아니다. 수도권정비계획법, 국가균형발전특별법, 조세제한특례법 같은 땅의 규제가 없는 지역들이다. 인천의 사정은 다르다. 인천은 땅과 바다 모두에 자치권이 없는 유일한 광역도시인 셈이다. 관련법을 그대로 두고 해양수산부 소유의 항만구역인 내항이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다고 해도 그것은 누구 것인가. 인천시가 공유수면 관련 법을 그대로 둔 채 준설토 투기장의 소유권을 놓고 해수부와 다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항만자치를 반대하는 정부의 논리는 항만 간 연계성 약화로 지역 중복 투자가 우려되고, 특정시설의 편중 개발 우려가 있다는 등 지방정부를 마치 유치원 보듯 하는 시각이다. 정부의 공공기관 관리 체계 개편에서 인천항만공사가 '국가공기업'에서 '기타공공기관'으로 변경된 것도 자율성 확대라기보다는 기획재정부의 경영평가 감독 권한을 해수부로 몰아준 것으로, 지방분권 차원에서는 무의미한 것이다.

셋째, 해시(海市)에 바다는 없다.

인천항은 시민들과 친하지 않다. 아니 담을 쌓고 산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바다 없는 해양도시, 무늬만 해양도시라는 자조는 이제 삭막한 인천의 대명사가 됐다. 부친이 인천항에서 무역을 했던 화교 3세 주현미가 부른 '내고향 인천항'을 듣고 있으면 쑥스럽다. 인천문학구장서 시민들이 부르는 '연안부두'도 바닷물은 만져볼 수 없는 담벼락 시설물 위의 횟집들이다. 인천 내륙 해안선은 134㎞인데 64㎞가 철책이고 영종, 청라, 송도, 용유·무의는 물론 심지어는 인천 도심도 14㎞가 가시철조망이다. 나머지도 사방이 온통 초소나 담벼락 돌무더기 등 군사·항만시설로 막혀 있다.

인천시가 철조망 제거 노력은 하는데 가시적 진척이 없다. 왜 그럴까. 전에 하던 방식(국방부 협의)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다른 결과를 바라는 것은 바보다. 시민들과 같이해야 한다. 만석부두, 화수부두를 가보면 매우 답답하다. 막힌 바다는 놔두고 여기저기에 수변공원과 산책로를 만든다고 자랑한다. 예산만 낭비하는 헛짓거리로 보기보다는 오죽했으면 저럴까 막막함이 앞선다. 확실한 것은 인천시민들의 소원은 바닷물을 만져보고 싶다는 것이다.

넷째, 모두 흩어져 있다.

항만사람들은 거의 인천사람이다. 하지만 하역사, 선사, 항운노조, 예선, 도선사, 물류창고, 포워더, 인천항 발전 전문가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다. 서로 다른 정보들을 갖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 민선 8기 유정복 인천시장 공약 1호인 제물포 르네상스에 대해 항만사람들은 인천항 발전과 배치되는 정책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항만·물류 기능이 살아있는 내항 2~7부두의 대체 부두는 어디냐는 것이다. 특히 중고차 수출 4부두와 양곡 7부두는 아직 계획도 미정인 신항 2단계 조성 외에는 대안이 없지 않냐는 것이다. 결국 이대로는 원도심을 활성화한다는 제물포 르네상스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개항 140주년 기념행사를 하자는 시민들의 성화도 없고, 중구 항동에 세웠던 개항 100주년 기념탑도 차량 흐름에 방해된다며 진작 치워 버렸다. 누가 무엇을 하든 내항 현안들이 잘 안 풀리는 근본적 이유는 서로 다른 생각들의 방치다. 인천항에 있는 인천사람들의 생각을 모으고 서로 다른 소리를 내는 악기들을 모아 교향곡을 연주하는 지휘봉이 인천시에 있어야 하나? 해수부에 있어야 하나?

항만공사, 해수부 부두 임대사업자로 전락
제물포 르네상스 '항만자치권 확보' 최우선
내륙 해안 134㎞중 64㎞ 철책 제거 등 과제
市 조례 '시민회의' 구성 함께 할때 길 생겨

인천시 조례로 '인천항시민회의'(가칭)를 구성해야 한다. 룰팔로워는 인천시 항만 관련 부서가 하고, 시민회의는 룰브레이커 역할을 해야 한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더 시간이 가면 합쳐지지도 않는다. 길은 원래 거기 있던 것으로 보이나 원래 있던 길은 없다.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나중에 생긴다.

항만자치가 인천의 꿈이 되어야 제물포 개항은 완성된다. 당장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은 꿈이 아니다. 이뤄질 수 있을지 없을지 심지어는 불가능의 냄새마저 짙어야 진짜 꿈이다, 수도권 규제 트랩에 갇힌 인천이 육지의 역차별을 바다에서 풀어내야 한다. 제물포 르네상스의 '지도리'도 결국 항만자치인 셈이다. 인천이 인천인 이유는 인천에 있다.

/박영복 前 인천시 정무부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