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말, 왜구의 기습 침략을 받은 조선은 혼비백산했다. 임진란 발발 수일 만에 동래성이 함락됐고, 선조는 비를 맞으며 통곡의 피난길을 재촉했다.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정도전이 주도해 쌓은 한양성도 조총의 위력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도성을 짓밟은 왜군은 잔해만 남은 성에 왜루(倭壘)를 쌓아 사직(社稷)을 조롱했다.
왜란에 이어 병자호란으로 반도 땅을 유린당한 후대 왕조는 국방력 강화에 몰두했다. 18세기 초 숙종은 수도방위를 위한 방책으로 한양성을 보강하고, 외성인 북한산성을 축조했다. 이어 인왕산 동북쪽 능선과 북한산 서남쪽 비봉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을 축성했다.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둘렀고,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공격할 수 있는 성구(城口)를 일정 간격으로 뚫어 놓았다. 세검정 인근 탕춘대(蕩春臺)에서 연유한 이름으로,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해 서성(西城)으로도 불렸다. 이로써 한양을 수성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3중 방어막이 완성된 셈이다.
한양도성,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묶은 '조선의 수도성곽과 방어산성'이 지난해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 등재목록에 선정됐다. 잠정목록 가운데 등재 준비가 잘 된 유산을 선정하는 단계다. 등재신청 추진 체계와 연구진 구성, 기준을 충족하는 연구결과, 보존관리계획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600년 넘는 성상(星霜)을 지킨 한양성은 조선 초·중·후기 석축 양식을 품은 문화재다. 수차례 증·개축이 이뤄지면서 축조 방법과 돌 모양이 달라 시대별 특징이 뚜렷하다. 초기엔 다듬지 않은 네모꼴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고, 벽면은 수직이다. 대대적인 개축에 나선 세종 때는 잘 다듬어진 두 세 척의 긴 네모꼴 돌을 하단엔 큰 돌로, 상부엔 작은 돌로 쌓았다. 성벽 중앙부가 밖으로 튀어나온 점이 돋보인다. 숙종 때는 2척(60㎝) 크기 정방형 돌을 일정한 간격에 수직으로 올렸다. 축성기술이 완숙해지면서 한층 견고해졌다.
탕춘대성의 정위치가 궁금해 위성지도를 검색해 봤다. 각종 개발행위로 파먹은 땅이 성곽 근처까지 침투한 흔적이 한눈에 보인다. 세계유산 등재의 우선 잣대는 보존상태라고 한다. 문화자원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나 지켜내는 의지와 노력이 앞서야 하겠다.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