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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소설가
허버트 조지 웰스는 '타임머신', '투명인간' 등으로 알려진 초기 SF의 대표적인 작가다. 그의 단편 '담장에 난 문'을 읽다가 '나, 이 이야기 알아, 이건 내 이야기야'라는 강력한 느낌을 받았다. 책 속 장면에 기시감을 느끼며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이건 정말 생각지도 않은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을 빨아먹는 몰아의 순간이다. 나는 읽던 페이지에 손가락을 끼운채 지금 막 떠오른 기억에 사로잡힌다. 어쩌면 책 읽기란 나에 대한 새로운 데이터를 캐는 행위인 것 같다.

'담장에 난 문'의 주인공은 다섯 살 때 거리를 걷다가 '하얀 담장에 난 초록색 문'을 발견한다. 어린 윌리스는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아름다운 정원에 많은 사람들이 경쾌한 분위기를 만들고, 왠지 모르게 퓨마 두 마리도 있다. 윌리스는 친구들을 만나 재밌게 놀다가 한 여자의 손에 이끌려 책 한 권을 보게 되는데, 거기에는 지금까지의 삶이 기록되어 있다. 책 속에서 문 앞에 서 있는 조금 전의 자신을 발견하자 어느덧 정원 밖으로 나오고 문은 사라져 버린다. 그 후 윌리스는 평생에 걸쳐 '담장에 난 문'을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정원과 퓨마에게 끌리면서도 번번이 그 문을 지나쳐 버린다. 보다 중요한 문제와 사회적인 책임과 급박한 일이 생긴 탓도 있지만 이상한 거부감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야기의 주인공이 늘 그렇듯이…. 결말은 각자 읽어보시라. 


이 작품은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독특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매우 보편적인 일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은유를 풀어버리면 '우리는 혼자서 간직하던 몽상을 평생에 걸쳐 주기적으로 마주치게 되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 기시감이라고 불리는 감정의 덩어리. 몹시 끌리면서도 번번이 외면하게 되는 초록색 문과 같은 나만의 세계. 소설을 다 읽고 나자 잊고 있던 꿈들이 떠올랐다.

웰스의 소설로 잊고있던 꿈 떠올라
혼자 간직하던 몽상을 주기적으로
마주치게 되지않나 라고 자문한다


사십대에 막 들어섰을 때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다. 나는 한 무리의 일행과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는 중이었다. 알프스 끝자락을 걸어가자 고풍스러운 마을 전경이 보였는데, 거리에 들어선 순간 그 곳이 앞면만 있는 가짜라는 것을 깨달았다. 발을 딛는 순간 도화지에 그린 그림처럼 도시 전체가 뒤로 넘어가 바닥에 납작하게 깔려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배경이 그려진 그림에서 종이 인형만 오려내어 세워진 것처럼 혼자 마을에 서 있었다. 꿈의 생산자이자 연출자이며 배우인 나는 큰 소리로 웃었고, 내 웃음이 파도를 불러와 마을은 물에 잠겨 버렸다. 좀 전까지 지극히 사실적인 상황이라 꿈을 꾸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발밑에 잠긴 도시 그림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 꿈을 중년에 꿨다는 것이 왠지 자랑스러웠는데, 그러니까 아직도 이렇게 뜬금없는 꿈을 꾼다는 사실에 신이 났는데 생각해보니 나만 그럴 것 같지가 않다. 내가 글 쓰는 사람이고 환상에서 이야기의 벽돌을 많이 가져다 짓는 타입이기에 꿈에서 '화석처럼' 캐어 온 것이 저런 장면이었을 뿐. 사람들은 사실적이면서 어딘가 이질적이기도 한, 정원의 퓨마같은 꿈을 꿀 것이다.
 

웰스의 소설처럼 나도 환상의 존재들과 재미나게 숨바꼭질을 하다가 혼자만 골목을 빠져 나온 적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전학생이 된 나는 살던 동네와 친구들을 잊지 않겠다는 모종의 맹세를 하고 밤마다 열심히 기억을 복기했다. 그 결과 성인이 되어서도 오랫동안 그 동네의 골목을 배경으로 하는 꿈을 꿨다. 나방이 빙빙 도는 밤의 가로등 아래에서 친구들은 나를 기다리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꿈속에 어린 친구들을 두고 어른으로 깨어나면서 매번 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을 다시 만날 모종의 '초록색 문'은 쉽게 찾을 수도, 열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생의 마지막 공상?… 알 수 없지만
신비로운 순간에 부지불식간 다짐


어쩌면 흰 담벼락에 초록색 문이 나타나는 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공평한 경험이 아닐까? 그 문을 열고 들어가 정원의 퓨마를 만지며 노는 것은 특정시기에만 가능한 은총인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내 소설의 주인공처럼 죽기 직전까지 눈꺼풀에 비치는 생의 마지막 공상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신비로운 물음표의 순간에는 부지불식간에 다짐하게 된다. 내 앞에 녹색 문이 나타나거나 회중시계를 든 토끼가 허둥지둥 뛰어갈 때 주저하지 않고 따라가는 어른-앨리스가 되고 싶다고. 그래야 벨벳같은 퓨마의 부드러운 털을 만져볼 것이 아닌가.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