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설치미술가 차기율(62)의 전시 '사유(思惟)'가 열리고 있는 인천 미추홀구 신기시장 가까이에 있는 작은 전시장 '공간 듬'. 전시장 내부 벽면에는 구멍이 여럿 뚫린 긴 나무상자가 붙어있다. 그리고 상자 위에는 나무로 만든 원판과 원기둥 조각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 위로 다시 동물의 뿔, 뼛조각, 진흙 덩어리, 용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물건 등 다양한 사물들이 올려져 있다.
전시장 바닥 한 구석에는 나뭇가지와 돌이 배치돼 있는데, 굽은 나뭇가지가 다양한 형태의 자연석을 바닥에서 한 뼘 정도 높이로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전시장 출입구 바로 옆에는 나무 액자가 걸려 있다. 액자 속에는 '글자'가 보인다. 전시를 설명하는 이 전시장 내부의 유일한 텍스트인데, 이렇게 쓰여 있다.
'침식된 대지·해안에 쌓인 모래·영원·사과나무의 육신·불꽃의 손가락·백화된 나의 영혼·침식된 언덕·횡단하는 자·불길이 물결치듯 대초원 위로 번졌다·퇴적된 모래·자라나는 상처·부유하는 영혼·생인손·해변의 낚시꾼·평평한 모래톱·떨어진 비늘·흩어진 파편·산 산 조각난 선체·소금기둥'
나뭇가지·돌·원기둥 등 추상 표현
낯선 풍경에 머릿속 물음표 떠올라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 같은 풍경을 처음 마주하게 되면 머릿속에 물음표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공간 듬 홈페이지의 설명을 빌리면 '순환하는 사물과 그와 관련된 추상적 개념에 대해 생각하는 전시'라고 한다.
또 옛 인간이 사물을 구성하는 다섯 개의 원소라고 여긴 불(火)·물(水)·나무(木)·쇠(金)·흙(土)과 인류의 기억, '역사적 연결고리'가 어떤 방식의 그물망으로 연결되고 전개되어왔는지,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에 대해 고민하고 사유하려는 '프로젝트'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차기율의 작업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제에 먼저 집중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대개 설치작품을 감상할 경우 작업의 주제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형식에 먼저 집중하게 되는데, 차기율의 작업은 형식을 감상하면서도 머릿속에는 항상 주제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생명과 순환·인간과 문명 등 고민
"나름대로 느끼고 생각해 보기를"
차기율은 그동안 '부유하는 영혼', '땅의 기억', '사유의 방',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 사이' 등의 주제로 작업을 선보여왔다. 생명과 순환, 인간과 자연, 문명, 모든 존재가 가진 기억 등이 그의 고민이자 작업의 주제다. 차기율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작업을 대할 때 감상자가 알쏭달쏭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예를 들면 전시장에 제시된 워딩(텍스트)은 작가가 "'침식된 대지', '해안에 쌓인 모래'에 대해 당신(감상자)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관객은 이 질문에 생각하고 고민하면 된다. 꼭 답을 내놓을 필요는 없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그의 작업들은 어찌 보면 '찰나의 파편'일지도 모른다. 작가도 자신의 '프로젝트'에 결론을 내지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진행 중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차기율은 "작가가 결론지어서 이야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관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고, 환경과 생태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자연이라는 존재와 이 문명에 대한 물음인 경우도 있다"면서 "감상자 나름대로 메시지(질문)를 느끼고 생각해보면 된다"고 했다.
차기율 작가는 지난해 제7회 박수근 미술상을 받았다. 오는 6월 박수근 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를 앞두고 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