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생부(殺生簿). 죽일 자와 살릴 자를 분류한 문서다. 한명회의 살생부가 원전에 가깝다. 조카의 왕권을 찬탈하려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 책사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역모의 걸림돌인 김종서 등 원로 중신들을 척살했다. 로마 제정의 기초를 놓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살생부에 올라 죽을 뻔했다.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을 수호하려는 독재관 술라가 카이사르를 공화정의 적으로 보고 살생부에 올렸다. 18세의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대숙청을 통해 100만여명의 정적과 인민의 적을 살해했다. 공산주의를 좀 먹는 수정주의자들을 겨냥한 중국 문화대혁명 10년간 수십 만명의 지식인과 수천 만명의 인민들이 희생됐다. 북한 조선중앙TV와 노동신문에서 사라진 당 간부들은 숙청된 걸로 보면 된다. 최고 권력을 보위하려 고모부, 의붓형도 살생부에 올려 숙청했다. 반동, 반당 살생부는 계속 업데이트된다.
살생부는 권력을 유지하거나 획득하려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하는 수단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절대권력 지배체제에서 만연했던 어두운 유산이다. 당연히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존재 자체가 금기이다.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시대착오형 용어라서다. 샐러리맨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직장 살생부는 살생부에 대한 민주시민의 생래적 반감의 표현이다.
그런데 유난히 한국 정치판에서 살생부가 횡행한다. 선거 직전 공천 때가 장날이다. 2004년엔 상대당 체포동의안에 반대한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살생부 명단에 올랐다. 2016년엔 새누리당이 비박계 살생부 논란으로 뜨거웠다. 엄격하게는 공천 배제로 정치생명을 끊겠다는 살부(殺簿)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살생부로 시끄럽다.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부결에서 이탈한 것으로 짐작되는 의원들을, 이 대표 지지자들이 공천 살부에 올렸다. 이 대표 사람 아니면 정치 생명을 끊어야 한다는 얘기다. '반란군', '반동분자'라는 섬뜩한 낙인들은 화풀이 수준을 넘었다.
민주주의는 살생부 전횡이 통할 수 없는 체제이다. 이 대표 팬덤이 아무리 강력해도 국민 아래에 있다. 게다가 정치는 생물이다. 살부와 생부의 운명은 정세를 따라 표류한다. 생부에 남았다 안도하고, 살부에 올랐다 낙담할 일이 아니다. 살생부를 단호하게 거부해 당내 민주주의부터 살리는 일이 급하다 싶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