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아버지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선처를 구하고 징계를 수용하면 끝날 일이었다. 생활기록부의 학폭 징계 기록도 2년 후엔 삭제돼 아버지와 아들의 인생에서 떠오를 일이 없었다. 정 변호사가 법정에서 얻으려 했던 법익은 징계 취소였다. 아들의 장래에 혹시라도 지장을 초래할 학폭이력 세탁이다. 재판이 길어지면서 피해자는 가해자와 함께 생활하는 2차 피해에 노출됐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시도했다.
정순신 사태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주는 비극
이재명 전위 문재인·이낙연 敵게시 반민주적
드라마 '더 글로리' 시즌1에서 학폭 가해자들은 고데기와 다리미로 주인공 '문동은'을 고문한다. 동은의 복수는 가해의 잔인성과 가해자의 반성 없는 악행으로 개연성이 뚜렷해진다. 시청자는 동은의 복수가 본격화될 시즌2를 학수고대한다. 예술에서 비극은 정화와 치유의 서사이다. 반면 현실의 비극은 권선징악의 궤도를 이탈해 권력 속에 은폐되고 더욱 잔혹하게 재생된다. 대중이 '더 글로리'의 현실판이라며 정순신 사태에 치를 떠는 이유다. 현실은 늘 허구를 압도하고 도피처를 잃은 대중은 절망한다.
학폭은 요즘 아이들의 세태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반영이다. 폭력으로 엉망진창이 된 우리 시대 말이다. 정치 언어는 적개심과 살기로 충만하다. 민주당의 언어는 반민주적이다. 이재명의 전위는 문재인과 이낙연을 적(敵)으로 게시한다. 대통령 부부를 인형으로 세워놓고 저주한다. 이재명을 기준으로 내부에선 동무와 반동을 구분하고, 밖으로는 선출된 권력을 저주한다. 국민의힘 언어라고 다를리 없다. 대통령실은 모욕과 냉대로 전당대회 경쟁 구도를 정리했다. 이준석은 소설 주인공 엄석대를 소환해 손오공의 분신처럼 부린다. 엄석대는 대통령이고 윤핵관이고 김기현이며 홍준표이기도 하니 만능이다. 전대에서 쏟아진 말의 성찬엔 국민이 없다. 내일은 없는 것인 양 오늘의 정적에만 집중한다. 국민을 대변(代辯)해야 할 정당들은 권력의 대변(大便)을 쏟아낸다.
정치뿐이면 선거 때마다 탄핵하고 심판하면 그만이다. 사회 구석구석을 지배하는 폭력의 양상은 거대하고 구조적이다.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사제들이 SNS를 십자가 삼아 댓글 성수를 뿌리며 사회 구석구석에서 사탄 색출에 나선다. 택배 노조원들의 조리돌림에 대리점주가 목숨을 끊은 건 사고이다.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을 가상 공간에서 노래시킨 유튜브 미디어는 권력을 감시할 언론의 사명을 강조하며 오보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의 구현은 우발적 사건 사고로 멈출 수 없는 대의란다.
국힘 전대 쏟아진 말엔 국민없고 정적에 집중
나와 우리로 분리·분열된 '정의' 실체 잃어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세상은 점점 정의와 멀어진다. 이유는 명확하다. 나와 우리의 정의만 정의라서다. 분리되고 분열된 정의들이 난투를 벌이자 정작 정의는 실체를 잃었다. 이념과 이권으로 분리된 전체주의적 집단들은 적진에서 공공의 적을 양산한다. SNS의 그늘에 숨어 놀잇감으로 표적을 찾는 반사회적 무리들은 적대와 혐오의 공간에서 기생하고 복제된다. 순수 이성은 오염된 감성에 치여 설 자리를 잃었다.
이문열은 엄석대를 통해 시대를 표현했다. 아이는 어른을 모방하고 학습하면서 어른이 된다. 학폭은 폭력 사회를 정교하게 모방한 아이들의 놀이판에 가깝다. 정 변호사의 공직 낙마와 아들이 여론의 심판에 선 것으로 정의는 실현됐는가. 아닐 테다. 더 큰 폭력과 비극에 한 고등학교의 학폭 서사는 묻히고 잊힐 것이다.
이번 주말 더 글로리 시즌2가 방송된다. 통쾌한 복수만큼이나 피해자 동은을 어떻게 치유할지 작가의 역량이 궁금하다. 허구에서나마 진짜 정의를 목격하고 싶어서다. 상처뿐인 '더 글로리' 사회. 국민들의 소망은 이처럼 소박하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