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날은 수업이 끝난 뒤 한 남학생이 손을 들고 이렇게 물었다. "노동자들이 재직 중엔 임금체불이나 성희롱 같은 문제가 있어도 신고를 꺼리는 이유가 뭘까요?" 응당 궁금할 만한 내용인데도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고민한 뒤, 아무래도 회사에서 법적으로 잘잘못을 따진 뒤에 다시 얼굴을 보고 일하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래도 여러분은 나중에 문제가 있으면 용기 내서 말하고, 참지 않고 가능한 수단을 썼으면 좋겠다. 미흡하나마 이렇게 답변을 마무리 지었던 기억이다.
부당해고 당한뒤 복직한 근로자
동료들과 일할 수 있는 산업현장
노무사로 일하며 나날이 딜레마가 깊어지는 영역이 '분쟁 그 이후'다. 해고, 징계, 직장 내 성희롱, 직장 내 괴롭힘 등, 노동 현장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은 내용의 심각성이나 승인 가능성 못지않게 분쟁 이후 노동자가 현장에서 겪을 삶과 관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당사자가 뒤돌아보지 않고 '쿨하게' 퇴사할 작정이 아닌 이상, 노동자는 치열하게 목소리를 높여 법적 다툼을 한 상대방(회사 그 자체, 또는 다른 노동자)과 분쟁 이후에도 계속 부대끼며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위와 현실 사이에서 내담자에게 무턱대고 용기만 주는 일은 다소 무책임하다고 여긴다. 당위. 회사 등 분쟁의 상대방은 분쟁의 결과와 관계없이 문제를 제기한 노동자에게 부당하게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 현실. 노동자들이 해고, 징계, 임금체불,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 등의 분쟁을 제기하는 상대방은 잘못이 그들에게 있다 하더라도 문제를 제기한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권력과 권한이 있다. 당위와 현실이 이만큼이나 멀리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당해고 인정을 받은 뒤 복직한 회사에서 금방 다시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해고를 당해 2차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하거나, 직장 내 괴롭힘이나 성희롱 신고를 한 뒤 명목상은 다른 이유로 전보나 징계를 당해 또 다른 분쟁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본다. 한 번의 용기로 끝날 줄 알았던 싸움은 두 번, 세 번의 결심을 필요로 하게 된다. 분쟁을 고민하는 내담자에게 '당신의 싸움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쉽거나 영광만 있는 길은 아닐 것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라고 일러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직장내 괴롭힘·성희롱 신고자에
'유난이다… 문제 만든다' 라고
손가락질 않는 조직문화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Happily ever after'를 소망한다. 부당해고를 당한 뒤 복직한 근로자도, 그런 일이 없었던 동료들과 똑같이 일할 수 있는 산업 현장. 직장 내 괴롭힘이나 성희롱을 신고한 피해자에 대해 '유난이다, 문제를 만든다'라고 손가락질하지 않는 조직문화를 희망한다. 용기를 내 분쟁을 하고 난 뒤, 결론을 받아들면 어느 쪽이든 깨끗이 승복하고 나면 신청인과 피신청인, 원고와 피고가 아니라 다시 사용자와 근로자로 돌아가 일할 수 있는 뒤끝 없는 사회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에게 더 많은 사례가 필요하다. '그리고 회사로 돌아간 노동자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이야기가 쌓이길 바란다. 최근 대법원은 수습기간 중 상사의 성희롱을 문제제기한 PD를 해고하고, 해당 PD가 노동위원회 구제신청 이후 복직했음에도 2차 해고한 전남CBS의 전 보도편집국장 등이 PD에게 손해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사건의 당사자는 강원CBS로 복직하기까지 2년6개월이 넘는 시간을 버텨야 했으며 노동위원회, 인권위원회, 민사소송, 형사소송 등의 지난하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제는 PD로 기록돼야죠. 잘 먹고 잘 살면서 잘 일하고 있다.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그의 잘 먹고 잘 살고 잘 일하는 이야기를 응원한다.
/유은수 노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