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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섭 광주문인협회 회장·수필가
피곤하고 고단함이 밀려올 때면 자주 찾는 곳이 바로 목욕탕이다. 시골 목욕탕의 경우 시설은 열악하지만 그래도 수수한 농촌 냄새가 물씬 풍기기에 꿩 대신 닭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사는 시골 목욕탕 또한 그리 넓지 않고 변변한 헬스기구 하나 없지만 피곤한 몸을 푸는데 그만한 곳이 없다.

얼마 전 그동안 코로나19로 가지 않던 동네 목욕탕을 실로 3년 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다녀왔다. 젊은 아빠가 초등학교 5학년쯤 되는 아들에게 등을 밀어주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 8월31일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 군대 가기 전날 간 목욕탕에서 아들과 함께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직장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와 얼굴을 마주 보며 아침밥을 함께 한 기억이 거의 없는 터였기에 서로 등을 밀어주며 모처럼 부자간의 정을 나누었던 그 날을 떠올리려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빠, 군 생활 잘하고 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군 생활 잘 마치고 더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집에 올게요"라면서 아빠를 위로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야속하게도 벌써 19년의 세월이 흘렀다.

안전사고 등으로 군대 간 젊은이들이 희생되는 광경을 언론을 통해 목격하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 아이가 성장해 군대에 갈 나이가 되면 남북통일이 돼서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이었다. 그런 상상을 뒤로하고 아이는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강원도 철원 최전방 부대로 입대를 하게 되었다. 자대 배치를 받은 지 4개월이 채 되기도 전인 2005년 1월18일 민통선 안에서 보초근무를 마치고 귀대하던 중 탑승했던 차량이 전복되면서 이 세상과 이별을 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 23년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과 같이 그해 3월12일 계룡산 자락 아늑한 곳 대전국립현충원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아버지'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흔히 부모님의 역할을 이야기할 때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절대 빈곤시절인 1960~70년대에는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게 아버지의 중요한 역할이 아니었을까 싶다. 직장에 충실하려 노력하다 보면 아이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갖기란 결코 쉽지 않다. 주로 아이의 성장 과정을 돌보는 것은 어머니의 역할일 수밖에 없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많아지는 요즈음과는 경우가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아무튼 아이가 성장하고 나면 어렸을 때 좀 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과 미안함이 남을 수밖에 없는 게 대한민국 아빠들의 모습일 것이다.

문득 세상에 계시지 않은 아버지의 삶이 떠오른다.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고는 하루를 버틸 수 없을 만큼 알코올에 의존했던 아버지. 어느 것 하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 아무리 노력해도 삶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갖지 못했던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였다. 가난했던 아버지 또한 내가 갖고 있는 똑같은 마음을 자식인 나에게 가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나이 칠십을 바라보는 지금에서야 아버지의 지극한 자식 사랑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부모는 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이 있다. 가족을 떠나보내는 슬픔은 별반 다르지 않지만, 유독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한없이 아플 수밖에 없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작가 박완서는 남편과 외아들을 연달아 잃고 하늘을 향해 이렇게 절규했다. '내가 이 나이까지 겪어본 울음에는 그 울음이 설사 일생의 반려(배우자)를 잃은 울음이라 할지라도 지내놓고 보면 고통을 견딜만하게 해주는 감미로운 진통제 같은 게 들어있었다. 오직 참척(慘慽)의 고통에는 그런 감미로움이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라고 했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라면서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끔찍한 일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고단하고 지친 육체 피로 해소를 위해 찾는 동네 목욕탕이지만 먼저 간 아들과 함께했던 슬픈 추억이 가슴을 아프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이와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다시는 나눌 수 없다는 현실이 나를 더욱더 슬프게 한다.

/김한섭 광주문인협회 회장·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