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에서 나고 자란 서정주(1915~2000)는 선운사 동백을 아꼈다. 스물여덟 봄날에 꽃망울이 아른거려 급히 사찰로 향했다. 때를 놓쳤나 조바심을 냈는데, 막상 마주하니 봉우리를 열기엔 한 참 멀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주막에 들러 막걸리 사발을 들이키는데, 어여쁜 주모의 육자배기 가락에 그만 취하고 말았다. 지난해 피었던 동백을 소리로 접하며 서운함을 달랜다.
동백 군락지는 남해안이다. 1~2월 엄동에 홀로 붉게 물든다. 선운사는 동백이 추위를 견뎌낼 수 있는 내륙지방 북방한계선이다. 봄바람을 맞아 분분히 흩어지는 여느 꽃잎과 달리 동백은 단칼에 베인 것처럼 수북이 쌓여 땅에서도 다시 피어난다. 미당(未堂)은 남녘 마을마다 동백으로 붉게 물들었다는 소식에 화들짝 놀라 발걸음을 재촉했으나 너무 이른 때라 낭패를 본 것이다. '선운사 동구'란 절창은 미욱함을 탓하는 청년 시인의 자탄이다.
선운사에 동백이 있다면 구례 화엄사엔 홍매(紅梅)가 있다. 양산 통도사 자장매(慈藏梅)와 더불어 국내 사찰을 대표하는 홍매화이다. 붉은색이 과해 흑매(黑梅)로도 불리는데, 아름다운 사진 명소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해 뜰 무렵 홍매를 두고 음양이 갈리는 장면이 경이롭다. 절 뒤쪽 백매화와 언덕배기 산수유가 어우러진 풍경이 장관이다. 이번 주말에 만개할 것이란 소식이다.
광양 매화마을은 벌써 축제가 시작됐다. 섬진강 매화로 일원에서 19일까지 이어진다. 매화단지는 울긋불긋 꽃 잔치가 요란하다. 희고 붉은 기운이 서로를 시기하며 다툼하는데, 노란 산수유가 끼어들어 지루할 틈이 없다. 팔각정자에 올라 별천지를 내려다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인파에 치이고, 고갯마루에 가빴던 숨이 조금도 수고롭지 않은 까닭이다.
남녘 봄바람이 빠르게 북상 중이다. 경기도 내 지자체들도 봄꽃축제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이천시 '백사 산수유꽃 축제(3월 24~26일)', 양평군 '산수유 한우축제(4월 1~2일)', '군포 철쭉축제(4월 28일)'가 이어진다. 경기도청 봄꽃축제와 고양국제꽃박람회(4월 27일~5월 8일)를 빼놓을 수 없다.
모란을 놓친 영랑(永郞)은 365일을 서럽게 울었다. 화무십일홍이라 더 귀하고, 더 예쁘다. 지고 나면 그뿐이다. 이번 주말엔 무작정 나서보자.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