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올라가는가. 연극의 대사는 모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으나 그 역사의 무대에서 밀려나고 몫이 없는 존재로 남겨진 사람들이 올라간다. 그들은 말하려고 올라간다. 그들은 하나같이 말하려는 자이다. 그들이 빼앗긴 것은 노동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언어마저 빼앗겼다. 착취와 수탈에 맞서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말마저 빼앗겼다. 그들은 빼앗긴 말을 되찾으려는 자이다. 가슴에 응어리진 말을 터트리려는 자이다. 그래서 오른다. 그래서 점거의 장소에 어제도 오늘도 오른다. 평원고무공장의 강주룡이 그러했고 한진중공업의 김진숙이 그러했다.
평양 을밀대 지붕·부산 영도…
타워크레인서 '노동해방' 외쳤던
강주룡·김진숙… 오르고 나서 '특별'
어디에 올라가는가. 생활과 일터의 자리에 오른다. 그 점거의 장소가 특별해서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르고 나서야 특별해진다. 오르기 전에는 일상의 평범한 공간에 지나지 않았으나 오른 후에는 해방의 장소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선언에서 온다. 빼앗겼던 말들을 되찾는 선언에서 온다. 착취와 수탈의 폭력에 맞선 선언이기 때문이다. "여기가 내 자리야." 그 선언으로 말미암아 생활과 일터의 공간이 권리를 향한 해방의 장소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 선언이 없었다면 그저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 머물러 있을 풍경에 그 선언으로 균열을 만들게 된다. 점거는 그렇게 생활과 일터의 공간을 변혁의 장소로 재탄생하게 한다. 강주룡이 오른 을밀대가 그러했고 김진숙이 오른 타워크레인이 그러했다.
왜 엑스트라인가. 이는 역사는 누구의 것인가 하는 물음과 닿아 있다. 수많은 역사가 승자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승자 중심의 역사는 마치 이 세계에 단 하나의 서사만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단 하나의 대서사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대서사에 의문을 품으면 그동안 가려졌던 수없이 많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이 세계에 단 하나의 서사만이 있다는 착각에 균열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사를 선택하거나 배제하는 분할의 경계선을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묻지 않았던 물음으로 선택과 배제의 경계선을 이전과는 다르게 그을 수 있어야 한다.
착취·수탈의 폭력에 맞선 선언
일터, 권리향한 해방의 장소 탈바꿈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에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만리장성이 준공된 날 밤에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개선문들이 참으로 많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 역사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10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거기에 드는 돈은 누가 냈던가?" 이제 우리는 다르게 물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관점의 이야기가 어떤 진실을 말해주는지 알게 되었다. '엑스트라 연대기'에 나오는 수많은 점거의 현장은 비록 승자의 서사에는 나오지 않을지 몰라도 점거가 해방의 장소로 전환하는 진실의 서사에는 결코 빠질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연극 '엑스트라 연대기'는 묻고 있다. 이제 관객이 답해야 한다고. 마지막 장면 연출은 그 의도가 분명하다.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으나 배우가 퇴장하지 않는다. 박수가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관객이 하나둘 극장을 나선다. 여전히 배우는 미동이 없다. 오히려 극장을 나가는 관객을 지켜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묻는 것이다. "관객이여, 당신들은 안녕한가"라고. 생략한 커튼콜 장면 연출로 무대가 현실의 시간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점거의 이야기가 무대가 끝나는 객석 앞에서 멈추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