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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정 정치2부(서울) 차장
'타인의 고통'을 쓴 수전 손택은 사라예보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내가 다른 나라 전쟁의 참상을 보며 '끔찍하군' 한 마디만 던졌듯, 내가 겪는 전쟁의 고통에 타국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낼 수는 없다. 사람이란 그런 존재다"(타인의 고통 p.151, 도서출판 이후)라는 말을 듣고, '무력감과 공포'를 끌어낸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은 '나는 거기에 연루돼 있지 않다'는 안도이고, 타인의 무관심에 관대한 것은 '무력감과 공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냉소 역시 사실은 분노와 좌절의 감정이 가득 찬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무력감과 공포, 동정을 넘어 악랄한 정치를 극복하라고 종용한다.

3·1절로 시작하는 3월이 이토록 고통이었던 적이 있나 싶다.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해 제3자 대위변제 해법을 우리가 제시한 것부터 한일정상회담 이후까지, 3월은 우리 대통령의 '무력감과 공포'를 드러낸 시간이었다. 지난달 22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과거에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며 "취임 이후 존재마저 불투명해져 버린 한일 관계 정상화 방안을 고민해왔다. 마치 출구가 없는 미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고 했다. 피해자와 유족에 대해서는 "유족들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만 언급했다.

'끔찍하군' 한 마디 하는 타인처럼 자국민의 고통을 보면서 '과거에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고 구경한다. 일본이 우리 피해자가 겪는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그저 받아들이는 데서 대통령의 무력감이 읽힌다.

그러나 식민지의 상흔은 전쟁의 상흔만큼이나 세월을 거치며 이리저리 왜곡돼 이 땅에 사는 온 가족에 새겨져 있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대통령이 역사와 국민 앞에 무력감을 드러낼 수는 없다. 윤 대통령은 국제정치의 악랄함을 담대하게 봐야 한다. 무력감과 공포를 걷어내고 보면 굴곡진 세월을 헤쳐낸 민족의 역량이 보일 것이다.

/권순정 정치2부(서울) 차장 s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