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는 한성임시정부와 만오 홍진(1877~1946) 선생을 통해서 인천과 연결된다.
국내외 임시정부는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태동했다. 같은 해 3월17일 노령(러시아)에서, 4월11일 상해에서, 4월23일 서울에서 각각 수립된 임시정부가 통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한성정부는 3·1운동 진원지인 국내에서 수립됐다는 점에서 정통성을 가진다.
서울 서소문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홍진 선생은 1906년 충청북도 재판소 검사로 임명됐고, 1908년부터 평양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홍진 선생은 1919년 3월 초부터 이규갑, 한남수, 김사국 등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계획했다. 정부 형태는 국내 13도 대표가 모여 국민대회를 거쳐 구성하는 민주공화정으로 구상했다.
13도 회의 비밀리 열고 헌법 통과
한성정부 선포 직전 中으로 넘어가
국회격 임시의정원 의장·국무령 역임
이들은 비밀독립운동본부를 만들어 3월17일 현직 검사 한성오의 서울 집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했다. 정부 이름은 한성임시정부로 지었다. 이때 국회 개념인 13도 대표자들이 4월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회의를 열어 정부 조직과 헌법 등을 통과시키기로 했다. 4월2일 만국공원 회의는 비밀리에 진행됐으므로 참석자들은 손가락을 흰 천이나 종이로 감싸 서로를 알아봤다.
한성정부 13도 대표자회의가 인천에서 열린 이유에 대해 여러 분석이 있다. 홍진 선생의 선영이 인천 관교동·문학동 일대에 있었다. 전문가들은 홍진 선생이 선영이 있는 인천을 안전하게 생각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3·1운동 이후 더욱 삼엄해진 일본 군경의 감시를 피해 서울을 벗어날 필요가 있었고, 외국인이 많이 사는 만국공원이 비교적 덜 눈에 띌 것이란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경인선이 있어 서울 접근성도 좋았다.
4월23일 서울 종로에서 13도 대표자가 국민대회를 열어 한성정부 수립을 선포했는데, 홍진 선생은 그 자리에 없었다. 홍진 선생은 해외 독립운동 근거지인 상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이 추진된다는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한성정부 선포 직전 중국으로 넘어갔다.
당시 한성정부는 상해정부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으나, 홍진 선생은 각 임정의 통합을 위해 활동했다. 임정 통합을 두고 상해와 노령 측이 갈등을 빚자 국내에서 13도 대표자들이 수립한 정통성을 가진 한성정부가 주목받게 됐고, 결국 한성정부를 중심으로 상해·노령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을 이뤘다.
홍진 선생은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 의장을 3번 역임했고, 1925년 4대 국무령을 지내기도 했다. 임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45년 12월2일 임정 요인 2차 환국 때 귀국했다. 1946년 9월9일 별세한 홍진 선생은 인천 선영에 묻혔다. 홍진 선생의 묘가 1984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될 때 인천시립박물관은 유가족의 허락을 얻어 선생의 묘비를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한시준 관장 "인천, 임정 산실·고향"
한시준 독립기념관 관장은 최근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가 펴낸 '인천과 13도 국민대표자회의, 한성정부 자료집'에 쓴 논고에서 "인천이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특히 임시정부와 관련해 크게 주목받고 자주 언급되게 된 것은 홍진 때문"이라며 "인천은 홍진을 매개로 한성정부,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됐다"고 했다.
이어 "한국독립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인천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산실이자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라고 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