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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소설가
세상에는 신뢰를 얻기 매우 힘든 곳이 있고, 한번 얻은 신뢰는 어지간해서 흔들리지 않는 곳이 있다. 나에게 ○○치과는 그런 곳이다. 젖니에서 영구치로 갈아타는 시기, 엄마를 따라 사거리에 있는 건물의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여느 꼬마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치과 침대만큼 공포스러운 장소가 또 있을까? 거기에 올라 초록색 턱받이를 하고 조명을 받고 있으려니 제물로 바쳐진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의사 선생님이 다가왔고, 나에게는 거인의 발자국소리처럼 들려 눈을 질끈 감았다.

과묵한 의사는 이런 일은 식은 죽 먹기라는 식으로 노련하게 진료를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선생님은 절대로 과잉진료를 하지 않았고 비싼 치료를 권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실력이 대단했다. 걱정에 비해 순식간에 치료가 끝나자 가글을 하며 얼떨떨해 하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십수년 간 나는 이 치과의 단골이 되었다.

멀리 이사를 간 후에 치과들이 다 비슷비슷한줄 알고 다른 곳에 갔다가 폭탄을 몇 번 맞고 나니 더욱 충성심이 생겼다. 엑스레이를 찍은 후 견적부터 부르는 치과가 많다는 것도, 대형병원이라고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 후로 시간을 잡아먹더라도 '치과만은' 이곳을 고수하게 되었다.

어릴적부터 신뢰 쌓인 46년된 치과
클래식 음악에 치료땐 양처럼 온순


○○치과는 개원한 지 46년이 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선생님에게 입 속 동굴을 내보였을까? 몇 년에 한 번씩 치과 갈 일이 생기다보니 내게는 치과 일정이 성장기에 살던 동네를 다시 찾아가는 모종의 추억여행이 되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이제는 사라진 서점이며 학원, 만두가게와 이불가게의 간편들이 떠오르고 퀴즈를 풀 듯 어느 곳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헤아려보게 된다. 여정의 끝에 사거리가 나오면 리모델링 했음에도 여전히 낡아 보이는 3층 건물이 보인다. 거리는 번창하고 상점들은 매번 바뀌지만 요지부동으로 변치 않는 것은 이 낡은 건물과 계단을 올라갈 때 나는 소독약 냄새다. 안으로 들어가 병원 의자에 앉아 있으면 항상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에 마음이 차분해지고 털이 깎일 양처럼 온순한 기분이 되었다.

갈 때마다 병원 안 풍경도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아이나 젊은 사람보다는 주로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로 채워져 있다. 대기 시간이 길어져도 불평들이 없다. 대부분 나처럼 이사간지 오래되었으나 치과 때문에 이 동네에 모처럼 온 사람들이고, 그날의 볼일은 치과 진료 하나뿐인 탓이다. 단골들끼리 대화는 이런 식이다. "이 병원에 다니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이십오년쯤 됐나?" "삼십 년도 넘었죠." "저는 초창기 때부터 와서, 거진 사십년이에요." 이런 대화의 결말은 항상 똑같다. 의사 선생님이 정년퇴임하면 우린 어디로 가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치과에 갔을 때 병원 옆 사무실에 들어갈 일이 있었다. 오랫동안 치과를 다녔지만 그 옆의 공간까지 치과가 사용하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 간호사 선생님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산더미같은 스피커와 오디오들이 쌓여있었다. 기기를 쌓아놓은 면적이 무려 대기실만하다. 그제야 대기실에서 들려오던 클래식이 유난히 듣기 좋았던 이유가 이 엄청난 기지에서 나온 정교한 음향 시스템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병원옆 사무실 '음향 시스템' 가득
선생님의 귓속 동굴 들여다본 기분
문 닫는날까지 난 그곳으로 갈 생각


선생님은 오랫동안 내 입 속의 동굴을 들여다보았지만 나도 선생님의 동굴을 들여다본 기분이 들었다. 한 자리에 46년간 진료를 하던 의사의 한결같은 여유는 스스로 커스터마이징한 오디오에서 나오는 클래식 음악이 아니었을까? 입속의 여린 살을 헤집는 치과 진료는 전동드릴 소리, 세척 소리, 그 밖의 신경을 곤두세울만한 소음들이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선생님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니 지난 46년은 이 소리만 듣고 산 게 아니라 내 귀에 맞춘 오디오와 스피커에서 나오는 베토벤, 슈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듣고 산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 오래된 단골들의 입속 동굴을 탐사하는 기나긴 시간 동안, 이 의사 선생님의 귓속 동굴도 깊어졌으리라. 아무튼 이 치과가 문을 닫는 날까지, 나는 이가 아프면 그리로 갈 생각이다.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