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규-이학박사.jpg
정명규 이학박사
약 100년 전인 1922년 5월1일에 소파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날'을 선포하고 그 다음 해에 어린이날 1주년을 기념하여 '어린이 해방선언'을 발표하였다. 어린이 해방선언에는 어린이에게 배우고 놀 권리와 인격적인 대우, 아동 노동금지와 같은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소파 방정환 선생님의 큰 뜻으로 시작이 되었으며 이전까지만 해도 아동에 대한 대우나 권리의 보장이 전무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당대에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어린이날을 제정하면서 쓰였던 어린이날 선언문은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그만큼 어린이를 대하는데 있어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올해 어린이날은 101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적인 해인 동시에 생각해 볼 만한 화두가 떠오르고 있다. 바로 '○린이'와 같은 표현에 관한 논란이다. 언제부터인지 미디어에서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이거나 그 영역에서 수준이 낮은'의 뜻으로 골프를 처음 시작하는 어른은 골린이, 요리에 소질이 없거나 막 요리를 시작하는 어른은 요린이 등의 단어들이 재생산되고 있고 이를 홍보라도 하듯이 각종 광고에서도 '요린이를 위한~'과 같은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는 현실이다.  


'○린이' 표현은 아동 능력을
어른 기준 과소평가 우려 스럽다
'NO키즈존'도 심리적 분리 내포


이러한 표현에 대해서 평소 어떠한 시각을 갖고 있으신지. '○린이'라는 표현은 이미 많은 언론에서 다루고 있듯 아동의 능력이 부족하고 숙련되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아동의 능력을 어른을 기준으로 과소평가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우려스럽다. 여러번 양보하여 '○린이' 라는 표현이 단순히 아동을 얕잡아 본다는 관점뿐만 아니라 '제가 미숙한 것이니 어린이를 대하는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라는 속마음이 숨어있다고 고려하여도 이는 분명 아동에 대한 편견을 나타내는 것이다.

'○린이'만 이러한 논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NO키즈존'에 대해서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인데 사실 NO키즈존은 단순히 '예의없이 마구 활동하는 아동은 사양합니다'라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그를 돌보고 있는 양육자까지도 'NO'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동은 혼자 카페나 식당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자명한 것인데 여기서 한 가지 꼭 생각해볼 점은 NO키즈존이 의미하는 것은 특정한 물리적 영역을 구획화하고 분리시키는 것으로 심리적인 분리까지도 이루어낸다는 것이다. 마치 아파트에 들어갈 때 입주민이 아니면 매우 인위적인 절차를 거쳐야만 해당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면적을 나누고 누군가의 승인을 거쳐야지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묘한 심리적 벽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용어라는 것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단한번 각인이 되어도 그 용어로 파생되는 효과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아동에게 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굴레를 씌우고 있는 중이다. 예를 한 번 들어보면 '장애우'라는 단어를 한 때 사용하다 지금은 사용을 지양하고 있는데 장애우에서 우는 벗우(友)자를 쓴다. 그러자 장애인단체와 전문가들은 장애우라는 표현은 비장애인 중심의 동정의 표현이라고 강한 불쾌함을 표시하였다. 이처럼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만들어내는 급작스러운 신조어는 곧 당사자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방정환, 존중하는 마음 품었을 것
세상 바라보는 '균형적 시각' 절실


소파 방정환 선생님께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을 때는 이들의 능력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지도 말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라는 간곡한 마음을 품으셨을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어떠한 특정 계층의 속성에 대해서 단정지을 수 없고, 단정을 지어서도 안된다. 특히 그 대상이 아직 성장하는 과정에 있거나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에 있는 계층일 경우는 더욱이 그렇다.

이렇게 단어를 분석하는 것이 너무 냉소적인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데 동시에 다행히도 우리 사회에는 희망적인 용어들도 생겨나고 있다. 저출산이 아니라 저출생으로, 유모차가 아니라 유아차로 용어들의 변화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 우리는 이 모든 가치관들이 소용돌이치는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중립적이고 균형적인 시각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대이다.

/정명규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