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호-인천본사 정치부차장
박경호 인천본사 정치부 차장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청 소재지가 우여곡절 끝에 인천으로 확정됐다. 지난 2월 재외동포청 신설 내용을 담은 정부조직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지 2개월 반 만에, 동포청 출범 예정일이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소재지가 결정됐다. 재외동포청 유치를 추진해온 인천 지역신문 기자로서, 동포청 유치 당위성을 보도하는 데 집중하고자 그동안 못다 한 아픈 역사 이야기를 잠시 꺼낸다.

오늘날 750만명 규모로 커진 재외동포사회를 위한 대한민국 행정기관의 출범은 '최초의 이민'에서 시원을 찾아야 한다. 1902년 12월22일 제물포(인천항)에서 하와이로 떠난 한국인 121명(최종 86명 정착)이 최초의 공식 이민자로 여겨진다. 우리 역사에서 아프고 미안한 이민의 출발이었다. 최초의 이민은 철저히 외국인들 주도로, 그들의 상업적 목적으로 기획됐기 때문이다.

웨인 패터슨(Wayne Patterson) 박사가 1988년 펴낸 한인 하와이 이민사 연구서 '아메리카로 가는 길'(2002년 번역 출간)을 보면, 하와이 이민의 최초 입안자는 대한제국에서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호러스 알렌(Horace Allen·1858~1932)이다. 인천에선 미추홀구 숭의동 옛 전도관 자리에 있던 '알렌 별장'으로도 널리 알려진 미국인 사업가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1900년 전후로 통제하기 어려워진 중국인·일본인을 대체할 노동력으로 한국인을 검토했고, 알렌을 만나 한인 이민사업을 연결해달라고 요청했다. 1902년 3월 알렌은 고종을 설득해 하와이 이민을 승인받았다. 알렌은 고종에게 ▲중국인이 못 가는 하와이(미국의 중국인 이민금지법)를 한인은 갈 수 있다는 점 ▲흉년으로 악화한 조선의 식량 사정을 이민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점 ▲이민 여권 발급 부서를 황실에 둬 수수료로 재정을 충당할 수 있다는 점 ▲한미 간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긴다는 점 등을 이민이 필요한 이유로 들었다.

그해 11월 미국인 데이비드 데쉴러(David Deshler·?~?)가 하와이 이민 대행 사업권을 따내고 이민자를 모집했다. 곧바로 대한제국 황실은 '유민원'(綏民院)을 설치해 여권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첫 하와이 이민은 전격으로 시작됐다. 최초의 이민자 상당수가 인천사람이었다.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지독히 고생하고 악착같이 살아서 오늘날 전 세계의 재외동포사회를 일궈냈다. 지난해 말 하와이를 찾아 한인 동포들의 절절한 사연을 듣기도 했다. (2022년 12월27일자 1·3면 보도)

재외동포청 소재지 결정의 '우여곡절'을 만든 건 정부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지난달 12일 재외동포청 소재지를 논의한 당정협의회를 가진 후 "금명간 확정 발표하기로 했다"고 했지만, 한 달 가까이 발표가 미뤄졌다. 그사이 여러 언론 보도에서 발표일을 전망했으나, 번번이 빗나갔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지난 4일 재차 당정협의회를 열어 소재지를 논의했고, 나흘이 더 지난 후에야 인천과 서울 '이원화' 방안이 발표됐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인천시와 지역사회의 노력으로 돌파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인천에서 떠나보낸 첫 이민의 역사를 후손들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재외동포청 설립 이유이기도 하다. 줄곧 인천시는 그들을 떠나보낸 장소에서 환대하고 싶다며 재외동포청이 인천에 세워지길 바랐다. 재외동포청은 국가사무라서 지자체 차원에선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나 "재외동포를 환대할 준비가 돼 있다"는 인천시의 환대를 정부가 적극 나서서 돕지 않을 이유는 없다.

/박경호 인천본사 정치부 차장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