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번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터진 미 중앙정보국(CIA)의 도청 논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지만, 첩보전의 주역은 뭐니뭐니해도 첩보원이다. 도·감청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이 직접 획득한 정보만 못하다. 특히 적대국 전복, 교란 공작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첩보원이 우리 편이면 음지의 애국자이고, 상대편이면 색출해야 할 간첩이다.
휴전 중인 남북도 전설적인 첩보원들이 명멸한 첩보전쟁의 현장이다. 국군정보사령부 소속 박채서 소령, 갑자기 사람이 변했다. 술먹고 도박하고 동료들의 돈을 떼먹었다. 엘리트에서 망나니로 전락한 그는 결국 1993년 쫓겨나다시피 제대한다. 실상은 대북 첩보활동을 위한 '인간세탁'이었다. 대북사업가로 변신한 그는 북한 김정일과 장성택을 접촉할 정도로 거물이 됐다. 그의 실체는 암호명 '흑금성', 안기부 요원이었다.
북한의 할머니 간첩 리선실의 전설도 이에 못지 않다. 제주 출신 1916년생인 그녀는 일찌감치 남로당에 가입하고 월북한 뒤 1966년, 1973년 두차례 남파 임무 수행으로 첩보 능력을 인정받았다. 1974년엔 일본으로 건너가 무려 6년간에 걸쳐 재일교포 신순녀로 완벽하게 위장했고, 1980년에 고정간첩으로 대한민국에 정착했다. 1992년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으로 존재가 알려졌지만, 이미 1990년 월북한 뒤였다. 공화국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천수를 누렸다.
수원지검 공공수사부가 10일 간첩 혐의자 4명을 구속 기소했다. 밝혀진 혐의 내용은 첩보전의 전형이다. 이들은 북한 공작원과 '총회장님'(김정은), '본사'(북한 문화교류국), '지사'(지하조직) 등 암호로 소통했단다. 기소된 4명은 '영업1부' 민주노총의 전직 간부들이었다. 접선 요령은 주도면밀했다. 손에 들고 있는 생수 물병을 마시면 선글라스를 손수건으로 닦는 것으로 접선자를 확인하고, 미행이 붙으면 담배를 피워 알리는 식이다. '실개천', '오르막길' 같은 특정 단어가 들어간 민노총 홈페이지 게시글과 댓글로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단다.
민노총은 120만 노동자들이 가입한 대한민국 노동조합이다. 대한민국이라 가능한 노동조합의 전직 간부들이 간첩이라면 충격적이다. 북한의 대남 첩보 공작이 만연했다는 증거다. 내년부터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폐지된다. 이래도 되나 싶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