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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수 노무사
영화를 즐기는 현대인이라면 저마다 '인생 영화' 몇 편쯤은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도 그런 영화들이 있는데 노무사로서 인상 깊었던 영화를 꼽자면 단연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을 들고 싶다.

영화는 주인공 산드라가 '내 일'을 할 수 있는 '내일'을 사수하기 위해 이틀 동안 다른 직원들을 설득하는 모습을 그린다. 산드라는 깊은 우울증 때문에 휴직했는데, 사장이 직원들에게 산드라의 복직과 보너스 1천유로(약 145만원) 중 선택하라고 투표에 부친 탓이다. 당연하게도 직원 다수는 산드라를 해고하는 대신 보너스를 선택했다. 재투표를 앞두고 산드라는 자신의 복직을 지지해 달라고 동료들을 찾아가 설득한다. 산드라의 병은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난관이다. 타인의 거절과 외면이 그에겐 몇 배로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울증 환자가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영화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들었던 생각이다. 실제로 산드라는 매몰찬 동료들의 거절, 또 그들이 보너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지켜보면서 몇 번이고 좌절하고 포기를 고민한다. 하지만 포기했다가도 맞벌이를 해야 하는 형편과 배우자의 북돋움 때문에 다시 동료들의 집을 찾아 나선다. 어떤 대목에서는 계속하라고 타이르는 배우자가 야속하게 보일 만큼 산드라는 힘겨워한다. 


포기 말고 가치 저버리지 않으면
설사 지더라도 '극복 가능' 메시지
 


노무사로 일하면서 마음의 병이 생긴 노동자들을 자주 만났다. 산드라처럼 병 때문에 회사로부터 공격을 받아 고통이 더 심해지는 사람도 있고, 회사나 상사와의 갈등 때문에 우울증이 생기는 경우도 많다. 일과 사람, 회사와 병은 복잡한 인과관계로 얽혀있다. 이토록 아픈 사람들이 노무사를 찾아왔다는 건 어떻게든 싸우기로 했다는 뜻이다. 싸움을 포기하고 주저앉은 사람들은 산드라처럼 동료를 설득하거나 전문가와 상담하는 시도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뢰인이 싸움을 결심했으니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서 잘 싸우는 것, 가능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전문가의 업이다. 하지만 가끔은 의구심이 든다. 싸움에서 이긴다고 이들이 치유될 수 있을까? 회사에서 제출한 편견 가득한 서면, 현실적인 이유로 반대 편에 서는 한때의 동료들을 보며 그들은 자주 상처 입는다. 어떨 때는 싸움 자체가 그들의 병증을 더 악화시키는 것 같아 안타까운 순간도 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결국 산드라는 치유했다. 의학적인 의미의 완치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결국 복직하지 못했음에도 싸움이 끝난 후 산드라는 훨씬 편하고 강해진 얼굴이다. 산드라는 사장과 마지막 면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배우자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 우리 잘 싸웠지? 나 행복해."

산드라의 '행복'은 싸우는 과정에서 자기 내부의 힘을 확인한 덕분에 생겨났다. 나약한 줄 알았던 자신이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자기효능감. 그리고 타인이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일 때 이타적인 선택을 하는 연대감과 도덕성이 내 안에 있다는 확신. 산드라는 자신을 복직시켜주는 대신 흑인 수습사원(어려운 사정에도 투표에서 산드라를 지지해준 동료)을 자르겠다는 사장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웠다면 비슷한 처지의
동료 외면하지 말고 손 잡아주길
그 용기가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한다


칼 융은 노이로제에 대해 "마땅히 부딪쳐야 할 고통을 피하는 데서 오는 결과"라고 했다. 과정이 힘들어서 포기했다면 산드라는 그저 무기력한 실직자로 남았을 것이다. 어쩌면 우울증이 더 심해졌을지 모른다. 혹 자기 대신 다른 비정규직 직원을 해고하는 선택지를 골랐다면, 싸움에서는 이기더라도 양심의 가책 때문에 진정한 마음의 치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치유를 위한 싸움의 규칙. 포기하지 말 것. 어떤 가치를 위해 싸우는지 명심할 것. 이기는 데만 급급해 그 가치를 저버리지 말 것. 그러면 설사 싸움에서 지더라도 치유할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다. 어쩌면 노무사로서 바라는 것도 이와 같다. 특히 마지막 규칙에 방점을 찍고 싶다. 당신의 싸움이 고통스러웠다면,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료를 봤을 때 외면하지 않고 손을 잡아주기를. 그 용기가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할 거라고 말이다.

/유은수 노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