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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클레오파트라를 흑인 배우가 연기하자 '블랙 워싱'을 넘어 역사 왜곡이라는 주장이 나온 탓이다. 블랙 워싱은 '화이트 워싱'에 조응하는 신조어다. 화이트 워싱은 아시안인 칭기즈칸을 존 웨인이, 흑인인 오델로를 로렌스 올리비에가 연기하는 백인 중심의 콘텐츠 생산 문화에 대한 비판적 용어다.

원작의 주인공마저 인종 세탁해 온 백인 우월주의에 맞불을 놓는 차원에서 등장한 블랙 워싱은 PC운동(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과 맥락이 닿아있다. PC운동의 선두에 선 디즈니는 인어공주 등 메가히트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하면서 주·조연들을 흑인으로 교체했다. 화이트이든 블랙이든 인종 세탁은 창작물이라 가능했다. 원작 훼손 논란은 있지만 시대정신을 수용한 해석과 재창작도 자유의 영역이라서다. 하지만 사실을 다루는 장르인 다큐멘터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리스계 왕조의 백인 여왕을 흑인으로 세탁하면, 사실과 역사가 흔들린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첫 변론' 제작이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2020년 7월 박 전 시장은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당시 인권위원회는 6개월간의 직권 조사 끝에 박 전 시장의 성희롱을 '사실'로 적시했다. 논란의 핵심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여부다. 다큐 제작진은 "1차 가해가 명확히 밝혀져야 2차 가해 판단이 가능하다"며 국가기관이 단정한 1차 가해 자체를 부정한다.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으로 부른 민주당 여성 의원들과 진보 여성단체는 침묵한다. 피해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박원순 무죄 호소인'들의 집요한 언어 폭력에 홀로 갇혀있다.

다큐 '문재인입니다'는 어차피 팬덤용이니 그들끼리 공유하는 사실의 틀에서 보고 즐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첫 변론'은 차원이 다르다. 피해자의 존재 때문이다. 국가기관이 인정한 '피해'로 살 용기를 얻은 사람이다. '피해자는 박원순'이라고 주장하는 다큐가 극장에서 상영된다면 어떤 심경일지 상상도 안 된다.

박원순은 진보의 표상으로 살아온 인생이 오점으로 얼룩지자 극단적 선택을 했다. 결단하기까지 고뇌는 처절했을 테다. 그 선택이 피해자를 영원히 가해하는 흉기가 되길 바라진 않았으리라 믿는다. 진실은 함부로 워싱할 수 없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