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한국은 제국주의의 폭압과 전쟁의 폭력, 그 이후의 이데올로기적 야만을 견뎌내면서 놀라운 성취를 이룩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경제적 투쟁이 이만큼의 풍요를 가능하게 했다면, 권력과 자본을 독점하던 세력에 맞선 민주화 과정은 지금의 사회적 자유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룩한 풍요와 안정이 사실은 가상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현재를 말하는 각종 지표는 실재의 삭막한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수백조의 돈을 퍼부어도 요지부동인 최악의 출산율은 물론, 각종 생명 관련 지표는 OECD 국가 최하위를 달린다. 그럼에도 이 정권이 들어선 이후 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은 급격히 악화되며, 애써 이룩한 민주화와 경제적 성취는 하염없이 퇴행하고 끝없이 추락한다. 실재의 사막은 파멸을 예고한다.
민주화로 경제적 풍요 이룩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경쟁 시달리는 현실
각종 생명 지표 OECD 국가 최하위
우리 사회는 더불어 함께 산다는 생각, 공동선과 미래 사회에 대한 개념이 전무하다. 그 대신 초등학생부터, 아니 태어나면서부터 경쟁에 시달리고 있으며 한 번 결정된 학벌은 죽을 때까지 능력의 낙인이 되어 우리를 옥죄고 있다. 청년들은 결혼은 고사하고 연예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사회는 계급과 성별에 따라, 소득과 직업으로, 이미지와 능력이란 이름으로 철저히 차별화한다. 세계 최빈국에서 가장 빨리 선진국에 이르렀다는 가상의 낙원이 사막보다 더 삭막한 현실을 가리고 있다.
그런데도 정치와 자본 권력을 장악한 이들은 그들만의 잔치에 유유자적이다.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삭막한 실재의 삶을 유희의 가상 세계에 잠겨있게 만든다. 특권을 독점한 소수의 세력은 매트릭스 세계의 수호자 스미스 요원처럼 지치지도 않은 채 허상을 반복하고 있다. 그를 떠받치는 주류 언론은 과거 독재 시대 자행했던 거짓과 왜곡의 매트릭스를 끝없이 반복하고 있다. 노동 없이 유지되는 사회는 없다. 그럼에도 한국처럼 노동의 정당한 권리를 악마시하는 곳도 없다. 노동 조건과 보상을 죽음으로 항거해야만 되는 사회, 그럼에도 자칭 일등 신문은 분신으로 호소하는 노조원의 절규를 왜곡하고, 심지어 그렇게 남긴 유서를 위조했거나 대필했다는 가짜 뉴스를 거리낌 없이 남발한다. 끊임없이 퇴행하는 현실을 가상의 유희로 조롱하는 정치권력과 법조 카르텔, 그에 동조하는 언론 카르텔과 고위 관료 집단은 실재 세계의 삭막함을 풍요의 가상으로 겉꾸미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생체 에너지를 수탈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그들만의 매트릭스 세계다.
정치·자본 권력 잡은 이들 유유자적
나만의 풍요는 허상… 공동선 지켜야
이 사회와 현실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한국 사회의 빈곤함과 야만은 우리의 선택에 의해 끊임없이 증폭하고 있다. 삶과 존재를 위한 의미를 외면하고, 지난 시간의 성취와 그나마 이룩한 작은 풍요에 취해 실재의 사막을 외면한다면 어떤 세계가 다가올지 자명하다. 이 현실을 직면하기란 참으로 어렵고 괴롭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끝자락에서 외치는 수많은 소리를 외면한 채 의미를 상실하고 안으로 붕괴되는 삶을 살텐가. 이 한줌의 풍요와 안정에 홀려 생명을 약탈당하는 허상에 안주할텐가. 그 사소한 욕망이 만들어낸 현실은 실재의 사막보다 더 가혹하다.
삶과 존재의 터전을 드높여야 한다. 같은 삶을 이어가는 우리에게 나만의 풍요와 안정은 허상에 불과하다. 기득권 카르텔과 풍요에의 가상을 깨는 빨간약을 택하는 길은 우리의 계몽된 정신과 욕망을 거부하는 마음에 달려있다.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공동선을 지켜야 한다. 실재의 사막에서 살기 위해서는 괴롭지만 계몽되어야 한다. 그렇게 맞이하는 현실은 삭막할지언정 적어도 생명 에너지를 빼앗기지는 않는 세계일 테다. 실재의 사막에서 맞이하는 아름다움은 가상을 깨는 나에게 달려있다. 돌아서면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과 의미가 그 사막에 널려있음을 알게 된다.
/신승환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