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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선의 설치미술전 '사이흔적, 간섭'이 인천 동구 '조흥상회' 건물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은 한희선 작가와 전시작 일부.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인천 동구 금곡동에 있는 '조흥상회' 건물에서 열리고 있는 한희선의 설치미술전 '사이흔적, 간섭'은 전시 제목처럼, 이곳 헌책방 거리에서 수집된 책(冊)의 '흔적'과 작가의 '간섭'을 다룬다. 지난 26일 전시장을 찾았다.

한희선 작가는 책에 구멍을 뚫어 기둥을 만들어 쌓고 나무 토막처럼 책을 자르고 붙인다. 어떤 경우에는 책의 특정 페이지를 떼어 한 데 모아 펼쳐놓기도 했고, 또 책과 관련된 작가 개인의 기억을 소환해 보여주기도 한다. 


젖어서 모든 페이지가 들러붙어 더 이상 펼쳐 읽을 수 없는 수명이 다한 책을 한 장 한 장 되살려내는가 하면, 같은 책을 여러 권을 모아두기도 하고 시간이 흘러 존재 자체가 희귀해 보물과도 같은 책을 진열해 두기도 했다.

책이 직접적인 표현 재료로 사용되기도 하고 책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담긴 누군가가 남긴 흔적이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작가는 "새 책과 달리 헌책은 누군가의 추억과 흔적이 담긴 물건으로서 똑같은 공산품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물건"임을 이번 전시에서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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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선의 설치미술전 '사이흔적, 간섭'이 인천 동구 '조흥상회' 건물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은 '무상(無常)'.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인천 '조흥상회'서 헌책 등 전시
2m40㎝ '주책' 제작과정 눈길
"낡고 무용한 것에서 찾는 美"


전시장을 들어서면 먼저 왼쪽 벽에 헌 책의 서지정보만을 모아둔 작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 하나 들여다보면 미소 짓거나 놀라거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예를 들어 '홀로서기'라는 시집의 서지 정보를 보면 이 책은 가격이 2천원인데, 1987년 3월 25일 1쇄를 발행하고, 같은 해인 1987년 7월 20일 19쇄를 찍어낸 기록이 남겨져 있다. 어떤 책에는 막 숫자를 공부하는 어린 아이의 낙서가 보이기도 한다. '정신건강간호학'(현문사 刊)이라는 책의 얼룩과 곰팡이 자국에서는 '뇌'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책에 구멍을 뚫어 철근에 끼워 2m40㎝ 높이로 쌓아올린 '주책' 제작과정에 얽힌 작가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책은 나무로 만든 물건이다. 작가는 목공 연장으로 쉽게 작업하려 했으나 책의 구멍을 뚫어내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드릴은 4~5페이지 이상을 뚫지 못했고, 결국 길고 긴 시간을 들여 작품을 완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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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선의 설치미술전 '사이흔적, 간섭'이 인천 동구 '조흥상회' 건물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은 '책 속의 시간'.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전시는 조흥상회에 딸린 1950년대 벽돌로 지어진 창고 건물에서 열리고 있다. 조흥상회 건물은 1930년대 지어졌다. 이 오래된 창고 건물 군데군데 벽돌이 깨지거나 빠진 구멍 속에는 향토사학자 최성연의 시조가 숨겨져 있다. 마치 보물찾기 하듯 이를 뽑아서 읽어보는 것도 무척 즐겁다.

작가의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전시장 한 편을 차지하게 된 5가지 버전의 '철학 에세이'와 한 할머니가 헌책방에 책을 주문하고 끝내 찾아가지 못한 '댄스박사 김길환의 탭댄스교본'도 충분히 감상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한희선은 "보는 이들이 낡고 무용해 보이기도 하는 것에서 미학적 아름다움을 발견해내고, 헌책에 담긴 기억이나 추억은 물론, 새로운 흔적을 만들어 각자에게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이달 말일까지 이어진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이번 전시를 후원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